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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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만주의 광개토대왕릉비

중국의 만주 지안시(集安市)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현존하는 한반도의 비석 중 가장 크고 웅대하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서기 414(장수왕 2)에 선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인 자연석에 글을 새겨 왕릉 곁에 세운 비()이다.

본래 능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비석을 1928년 지안시의 시장이 소형 비각을 세워 보호해 왔었는데 1982년 동북공정을 시작하던 중국 당국이 다시 대형 비각으로 바꿔 보호하면서 속국의 역사유물쯤으로 선전을 하고 있다.

이 비는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용비어천가 등 몇몇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는데, 조선후기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출입을 통제했던 청나라의 봉금제도가 풀리면서 비로소 발견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뜨기 위해 비석글자를 가리고 있는 이끼에 불을 피워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떨어져 나가거나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결국 일본제국의 황당한 역사논쟁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우산공원에 세워진 친일파 송덕비

영광군에서는 군 청사를 신축하면서 군청 경내에 세워져 있던 역대 관리들의 공적비를 우산공원으로 옮겼다.

1558(조선명종13)으로 추정되는 이관(재임1557.01.241558)군수의 선정비를 비롯하여 1969년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김문수 군수(재임1963.03.051965.08.01)의 공적비까지 총 19기의 비석이 공원 정상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자세한 공적내용이 비문으로 새겨져 있지 않아 무슨 공헌을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전면에 불망비에서 부터 유애비, 선정비, 거사비, 추도비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영광을 거쳐간 관원들 중에 고을민들의 칭송을 받았던 분들이 아닌가 생각을 해왔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우산공원의 일부 비문에 새겨진 이름이 친일파의 이름과 겹친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료를 찾아 생몰연대와 출신지 등을 대조해보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관찰사 이근호

관찰사 이근호는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올라간 인물이다.

충청북도 충주의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명성황후의 측근이었던 동생 이근택이 힘을 써 정부요직에 기용된 후 1898년 경무사에 임명이 되었으며 전라도 관찰사와 육군참모장을 거친 후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는 일본으로부터 조선귀족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근호의 집안은 아들과 다섯 명의 형제 등 6명이 모두 일본귀족이 된 대표적인 친일 집안으로 주변사람들은 이들 5형제를 '5(五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얼마 전, 이근호의 친일행위로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경기도 화성시와 오산시, 충북 음성군 등의 토지를 되찾고자 이근호의 손자가 소송까지 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영광군수 민치헌

영광향교의 명륜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거금 500냥을 기부했다는 기록이 영광향교사에 남아있는 민치헌(閔致憲)은 조선 말 세도가였던 민씨일파로 당시 지방관리 평가조서에서 영광군수 시절 백성들을 구휼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은혜를 베풀었다며 ()’급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평가가 당시의 세도집안이었던 민씨세력들에 의해 조작되고 있었다는 주장과 맞아 떨어지면서 여러 번 수령을 지내면서 분에 넘치는 짓을 하고 재물을 모으는데 욕심이 끝이 없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원지(遠地)로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이 고종실록에 나와 있다.

영광군수 조병연

곡성과 영광군수를 지낸 조병연의 친일행위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일본제국으로부터 주요 훈포상을 받은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일제의 조선통치 방침과 조선인 관료 161명에 이름이 올라 있다.

()란 그 시대를 조명하는 명문(銘文)으로 된 거울이자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문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을 유추해보거나 숨겨진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사료이기 때문이다.

조선침략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비문의 사라진 몇 글자를 왜곡해 일본이 한때 한반도를 지배했었다는 황당무계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던 광개토대왕비가 비문을 통한 역사왜곡의 좋은 예라고도 하겠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의 관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는 가짜 비석을 색출하는 일이 빈번했다.

개인사 든 지방사 든 간에 일부 잘못 새겨진 명문으로 인해 지방의 민의가 잘못 전해지거나 나아가 나라의 역사까지 왜곡되게 되는 중대한 사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친일파 이근호의 공덕비는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그가 전라도 관찰사 재직시절 전라 여러 곳에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도록 채근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백성들을 수탈하거나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했으면서도 버젓이 비를 세워 후대들에게 칭송을 받는 이런 터무니 없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우리 군에서는 정확한 진위를 파악한 후 민의를 모아 비를 파기하거나 공덕비 옆에 비위사실을 새겨 후대들이 반면교사로 삼도록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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