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공동체 살림꾼

최근에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라는 책을 쓴 김탁환 작가를 만나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 책에서 농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삶, 그 안에 담긴 본질적 가치에 대한 아름다움을 역설했는데, 내가 알고 내가 살고 있는 농촌의 현실은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아서그 책의 제목이 참으로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물었다. “농적 가치를 지키는 삶은 굉장히 고단하다. 농업농촌을 홀대하고 농부를 천대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농촌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이런데도 희망이 있다고 보는가?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김탁환 작가가 대답했다. 현실이 절망적이므로 우리는 더더욱 희망을 갈구하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냐고. 작가는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 옆에 서 있는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런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우문현답이라고 생각했다. 절망적인 현실만 탓하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말인가.

돌아보면 희망은 인생의 화두이고, 역사의 화두이고, 문명의 화두였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1991<녹색평론> 창간사의 첫 문장이다. 1991년이면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승리의 축배를 들며 신자유주의로 무한질주하던 때다. 이 시기에 <녹색평론>은 자연세계와 상생하지 못하는 진보적 사회사상의 미흡함을 지적하며 생태학적 위기 극복과 농업중심의 경제생활 복구, 공동체 복원을 통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 등을 목적으로 발간됐다. <녹색평론> 발행인 고 김종철 선생이 당시에 환경재난을 개탄하며 우리 사회에 던졌던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기후위기, 생태위기, 경제위기로 갈수록 불안은 가중되는 반면 희망은 잘 보이지 않는 위태로움의 연속이니 말이다. 지구 환경은 인간의 축적과 파괴 행위를 감당할만큼의 수용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인간은 세상 만물 중에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유일한 존재. 세계를 완전히 인식하고 자연을 지배할 수 있을거라 장담했던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일찌기 겪어보지 못했던 거대한 위험 앞에서 여전히 과학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차라리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에서처럼 거대한 노아의 방주를 만들고 지구 밖에서 새로운 인류의 건설을 준비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거듭되는 환경 재난속에서도 위기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안일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철학적, 도덕적, 문화적 위기로 지금의 상황을 재인식해야만 정직한 절망이 가능하지 않을까. 개발과 성장의 폭주기관차 위에서 벌이는 축적과 소비의 향연을 끝내자는 말은 삶의 철학과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일 터이다. 희망은 절망의 늪에서 피는 꽃이라 했으니, 직면한 현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먼저다. 자본주의 성장의 역사는 빵의 오염보다는 빵의 부족을 해결하는데 치중해왔다. 이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세계는 양극화되고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성장의 열매는 기득권에게 집중되어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김종철 선생은 산업문화의 헤게모니에 대하여 근본적인 비판과 대안을 발전시키지 않는 한, 어떠한 진보적인 정치 사회적 이념도 부적절한 것일 수 밖에 없다고 일갈했었다. 오늘날 맞딱드린 빵의 오염이라는 현실은 자본주의 산업 문화에 물든 인간 생존 방식의 근본적인 반성과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의 중심에는 마을이 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했던 반세기 전 간디의 외침은 21세기에 맞닥뜨린 위기를 극복할 '패러다임 대전환'의 선언이 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시대, 마을은 지역화 전략의 거점이자 상호연대와 호혜 협동의 원리로 삶을 재구성하는 새로운 터전이다. 지금 마을이라는 이름을 달고 벌어지는 모든 활동들은 자율, 연대, 생태, 자립, 자치와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집합적인 움직임이다. 자본주의 경쟁 논리와의 싸움을 동반하는 마을의 부활은 화려한 귀환이 아닌 오래된 미래로 나아가는 쉽지 않은 여정일지 모른다. 지금 당장 변화를,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어제와는 다르고,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실천에 집중해야 한다. “과연 희망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김탁환 작가의 대답처럼,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 또한 더 치열해야 하지 않을까. 희망은 그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눈빛 속에, 굳은 살 밝힌 손발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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