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영향력-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1813~1855, 덴마크의 철학자. 실존주의의 선구자)의 어머니 안네는 원래 그 집의 하녀였다. 여덟 살에 학교에 들어간 키르케고르는 비록 몸이 허약하긴 했으나 대단히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별로 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 열일곱 살에는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친위대에 입대했다가 몸이 약해져 곧 제대하였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문학과 철학 쪽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아예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극장이나 다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신학 고시도 포기하였다. 형과의 사이도 좋지 못하였는데, 또 불과 3년 사이에 어머니와 세 형이 죽고 말았다.

키르케고르는 스물세 살에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아버지에 대한 비밀.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는 우울한 성격에 늘 근심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종교심이 깊은 데다 매우 총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미카엘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죄란 어린 시절 유틀란트(덴마크에서 북쪽으로 뻗은 반도) 황야에서 심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것과 하녀와의 혼외(婚外)정사로 아이를 낳게 한 죄였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얻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녀들이 예수가 이 세상에 살다 간 나이인 33세를 넘기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더욱이 그의 일곱 자녀 중 상당수가 어린 나이에 죽음으로써 그의 믿음을 굳게 해주었다. 그러나 자녀 가운데 두 명, 키르케고르와 그의 몇 살 위의 형 페테르 크리스티안33세를 넘어서까지 살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믿음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페테르는 나중에 신학자가 되어 정부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루터교 주교(主敎-교회의 여러 교구를 다스리는 직책)를 지내기도 했다.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예수의 은총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고자 했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또 그는 막내아들과의 관계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막내인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와 함께 놀면서 상상력을 맘껏 키워나갔다. 미카엘은 막내아들 키르케고르에게 엄격한 개신교 교육을 베풀며, 마음속으로는 그가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키르케고르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따랐기 때문에 그의 어두운 성격, 신앙심, 그리고 가르침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키르케고르의 우울한 성격과 어떻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하는 평생의 문제의식은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위대한 저서들 역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의 산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임종을 맞이한 미카엘은 막내아들에게 개신교 목사가 될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82세의 나이로, 1838 89일 사망하였다. 아버지의 종교적 체험과 삶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키르케고르는 어쩐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틀이 지난 811,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수요일에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몇 해라도 좀 더 오래 살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나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합쳐진 존재이다.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내가 신중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의 기억을 안전하게 숨겨서 보호하는 일이다.”(영광 출신, 철학박사,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 이야기중에서)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