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영향력-사르트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노벨상이 서양에 치우쳐 있고, 문학이 제도권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한다.’며 수상을 거부하였다. 사르트르의 아버지는 해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원시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의 사촌으로 자존심 강한 여인이었다. 독일의 의사이자 음악가이며 철학자이자 목사인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이념이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는 이유로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아버지는 사르트르가 두 살 때,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얻은 열병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그 때문에 사르트르에게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아버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오래 살았다면, 그는 나의 머리 위에 군림하며 나를 억압하고 있었으리라나는 내 위의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은 뒤, 사르트르는 외가로 갔다. 뒷날 사르트르는 그의 자서전에서 선천적 근시와 사시(斜視-두 눈이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시력 장애), 외갓집의 생소함(낯섦) 등 이때 겪은 심리적 부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여섯 살 때는 외할아버지 샤를 슈웨체르(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교의 독문학 교수, 슈바이처 박사의 큰아버지)를 따라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가 파리에 외국어연구소를 세워 그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사르트르를 몹시 귀여워하였고, 그에게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주었다. 굉장한 독서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서재 안에서, 사르트르는 마음껏 책을 꺼내 보았다. 책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아홉 살이 되자 센(Seine)강 강가의 헌책방을 뒤져 모험소설을 비롯한 문학 서적을 500여 권이나 사서 읽어나갔다.

그러나 열한 살 때(1916) 어머니가 재혼함으로써 그는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아야 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불행한 3~4을 보내는 동안 그가 특별히 구박을 받았다거나 미움을 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지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 소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력감을 강하게 느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난히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까닭은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그의 어머니는 그가 조금이라도 떠들며 장난을 치면애야, 조용히 해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한다거나, 혹은그것은 만지지 마라! 우리 것이 아니니까.하고 억눌렀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관련하여, 어린 사르트르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는 관점도 있다. 예컨대, 그는 아버지의 속박으로부터 일찌감치 벗어나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댁에 얹혀사는 처지에서 특별히 자신의 존재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덕분에 어머니를 따라 고서점에 가서 독일어책을 읽고 수백 쪽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잉여 인간으로 간주한 사르트르는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믿음을 일찍부터 가졌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실존주의 사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우선 실존(實存-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함)하고, 그 후에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영광 출신, 철학박사,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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