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성리학의 스승으로 추앙… ‘일본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

얼마 전 광주MBC에서 다큐드라마 '간양록'을 방영했다. '간양록'은 일본 오즈시의 한 사찰에서 시작됐다. 일본인들이 모여 먼저 간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준비했다. 경건한 추모 의식의 주인공이 조선관료의 관복과 관모를 갖추고 있다.

이역만리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제사상을 받는 이 조선인은 누구인가? 이에 대한 물음으로 실타래를 풀어나간 '간양록'은 다큐와 드라마를 접목시켜 흥미진진했다. 철저한 고증과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어렵기만 한 역사를 쉽게 풀어줬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일본에서 28개월 남짓 포로로 살며, 일본의 정세를 살펴 조정에 보고했다. 적진에서 몰래 세 차례나 보낸 '적중봉소(賊中封疏)'가 그것이다. 조선이 당시 적국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강항은 일본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를 통해 조선의 성리학도 전수했다. 당시 일본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다. 강항이 전한 성리학이 일본 근대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항은 16살에 향시, 21살에 진사에 합격했다. 27살에 과거에 들어 벼슬길에 나갔다. 강항은 임진왜란에 이은 1597년 정유재란 때 호조참판의 종사관으로, 전라도의 군량미 수송을 책임졌다.

일본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자, 강항은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중과부적이었다. 강항은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싸우려고 배를 타고 가다가 일본군한테 붙잡혔다. 도망을 치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순천과 부산 앞바다를 거쳐 일본으로 압송됐다.

강항은 일본에서 유학자들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적진이었지만, 일본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이야기했다. 후진도 양성했다. 자연스레 일본 성리학의 스승으로 대접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통치 및 관료체계, 지리와 풍속을 살폈다. 군사 정세와 시설, 장수 명부까지도 입수했다. 성곽의 건축법까지도 꼼꼼히 챙겼다. 전쟁에 대한 일본과 조선의 대처방안을 비교하며 조선의 군사제도를 비판하고, 총체적인 개혁 방안까지 고민했다.

강항은 정탐의 결과를 조선에 몰래 보고했다. 그 기록을 한데 모은 것이 '건거록(巾車錄)'이다. 죄인이 탄 수레, 즉 포로생활을 한 자신의 경험담을 적은 글이다. 나중에 제자들에 의해 '간양록(看羊錄)'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한편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 오즈시의 시민회관 앞에 강항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 '일본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씌어 있다. 그 지역에 강항 현창사업회와 연구회도 꾸려져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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