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공동체 살림꾼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토지, 노동, 화폐를 상품으로 만들고 개발지상주의에 몰입한 대가로 사람들간의 연결망은 단절되고 공동체는 해체됐다. 삶에 대한 위기의식이 '마을'을 소환했다. '마을'이라는 인간생활의 최소단위를 생태적, 인간적으로 복원하고 풀뿌리 단위의 자립과 자치를 실현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됐다. '마을'이라는 이름을 단 각종 '사업'들이 중앙부처부터 지자체까지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이렇게 재탄생한 마을들은 과연 지속가능할까? "실적 위주의 마을 만들기 사업은 토건주의와 닮아 있다""마을은 소비되고 있고 사람들은 지쳐서 현장을 떠나고 있다"는 한 마을활동가의 고백이 아프게 다가온다. '마을이 소비되고 있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마을활동가들의 '노동'이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과 노동은 공동체를 이루는 필수요소다. '관계망'을 구축한다는 것은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의 결과물이다. 마을활동가들은 마을의 의제를 주민들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설득하고 조직하고 연결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마을 만들기 전 과정에 마을활동가의 노동이 스며들지 않은 것이 없다. 기존의 임금노동체계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을활동가들의 노동은 어떻게 평가되고 대우받아야 할까. 그래서 상상해 봤다. 마을활동가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마을은 어떻게 달라질까?

극단적인 불평등과 빈곤의 시대, 기존의 임금노동체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현대 복지국가의 설계도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대량생산 시대 현대 복지국가의 근간이 된 '베버리지 보고서'(1942) 이후, 1백년도 채 지나지 않았으나 인류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고령화, 기계화(자동화), 노동의 변화, 빈곤의 확산, 불평등(소득 양극화) 심화 등은 복지국가 탄생 초기에는 고려하지 못했던 문제들이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부의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소득이 적고 가난할수록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복잡하게 설계된 복지제도도 안전망이 되어주지 못했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당하고 국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외롭게 자살을 선택했던 '송파 세 모녀의 비극'(2014)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기술의 발전은 일자리의 빠른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건 생계 곤란의 절벽이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고용의 불안정성소득의 불안정성사회적 보호의 불안정성'이라는 연쇄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사태도 기존의 복지제도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동시에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경험은 패러다임 전환의 새로운 기준선을 제시했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된 셈이다. 국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되었던 '긴급재난지원금'은 그 자체로 기본소득에 대한 '학습효과'를 가져왔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소득보전을 통한 구매력의 상승은 실물경제의 선순환을 도왔다. 일자리 위기에 놓인 비정규직, 일용직, 문화예술인,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사람들은 '소비 행위'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윤리적, 사회적 가치를 담은 행동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복지의 본래 기능은 '소득재분배'이다. 재분배는 평등을 지향하는 정책이다. 어떤 평등을 실현할 것이가, 어떤 불평등을 용인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철학이다. 새로운 복지국가는 20세기 초와는 달라진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새로운 상상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도와 행정의 부분적인 수정을 넘어서는 과감한 전환과 '새로운 국가'에 관한 총체적인 비전이 필요하다. 임금노동에 기반한 '사회보험' 위주의 기존 복지제도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고, 개별적이고, 정기적인 현금 소득 지급을 골자로 하는 '기본소득제'는 상호보완적인 방향에서 정합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재원 마련, 즉 증세를 위한 과세제도의 변화와 조세구조조정 방안도 필요할 것이다. 학교 무상급식 문제로 '보편적이냐 선별적이냐'를 놓고 온 나라가 논쟁을 벌였던 것이 불과 10년 전 일이다. 우여곡절을 뚫고 무상급식은 시행되었고 고등학교까지 전면 무상급식하는 시대가 코 앞에 왔다.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 이미 핀란드, 스위스, 미국, 인도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구체적인 실험을 하고 있다. 전환은 이미 시작되었다. 기본소득이 새로운 복지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 것은 대세다. 남은 건 시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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