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선한 영향력(2)-구마라습

구마라습(344~413)의 아버지는 천축(고대 인도)에서 재상(오늘날의 장관급)의 지위를 버리고 서역(西域-중국의 서쪽 지역)으로 왔다.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했다는 그의 소문이 구자국(龜玆國-실크로드 교역국들의 갈림길에 있던 나라) 왕의 귀에 들려왔다. 이에 왕은 그를 국사(國師-임금의 스승)로 삼고, 자신의 누이동생과 결혼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구마라습 형제가 태어났다.

그러나 구마라습의 어머니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던 차에 묘지 사이를 비집고 나온 백골들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다. 6일 동안의 단식 끝에 남편의 허락을 받아낸 모친을 따라 당시 일곱 살의 구마라습이 집을 나섰고, 이후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떠돌아다녔다.

구마라습은 이 무렵부터 불교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날마다 1천 개의 게송(偈頌-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공덕을 읊은 운문)을 암송했다. 한 개의 게송이 32()였기 때문에 하루에 외운 글자가 모두 32천 자에 이르렀다. 이를 보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나이 12세 때 어머니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만난 어떤 수행승은 구마라습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그대는 나이가 35세에 이를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장차 아소카 왕(인도를 통일한 왕)불교에 귀의시킨 승려 우파굴다처럼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구마라습이 명성을 떨쳐가던 379, 중국으로 들어간 승려들이 구자국의 구마라습이 매우 신통하며, 대승불교에 정통하다.”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명망 있는 승려 도안이 전진(前秦)의 제3대 황제 부견에게 구마라습을 초청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구마라습은 부견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382년 부견의 부하 장수인 여광이 병사 7만 명을 거느리고 구자국을 공격하여 구마라습을 사로잡아왔다. 부견은 구마라습으로 하여 구자국의 왕녀(王女-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권했다. 구마라습이 끝까지 버티자 여광 장군이 독한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왕녀와 강제로 관계를 맺게 했다.

여광은 구마라습을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광 일행이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전진(前秦-516국의 하나)이 멸망하이 틈을 타 여광은 스스로 후량(後涼, 386~403)의 왕이 되었다. 이후 구마라습은 18년 동안 여광과 그의 아들 여찬에 의해 갇혀 있다가 401년 후진(後秦)에 의해 후량이 멸망하자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후진의 군주 요흥이 구마라습을 국사(國師)로 예우하자 구마라습을 따르는 신도가 수천 명에 이르고, 고관대작들 역시 그를 부처님처럼 받들었다. 이 무렵 요흥은 구마라습의 신통함과 통찰력에 욕심을 낸 나머지, 후사(後嗣-대를 잇는 아들) 갖기를 권했다. 구마라습이 끝내 반대하자, 요흥은 기녀(妓女-기생)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리하여 두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모두에 정통했던 구마라습은 중국 불교의 4대 불경 번역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가 번역한 경전들은 오역(誤譯-잘못된 번역)이 거의 없어 후세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자로 도생, 승조, 도융, 승예 등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십문사성(什門四聖-구마라습 문하의 가장 뛰어난 네 제자)이라고 불렀다. 입실제자(入室弟子), 즉 스승과 같은 집에서 먹고 살면서 가족의 일원처럼 지내며,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배우는 제자는 3천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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