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선한 영향력(3)-율곡

대한민국 최고의 고액권(5만 원권)에 등장하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는 왕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현모양처의 표상이라 불리는 신사임당이다. 더욱이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역시 5천 원권의 초상화 주인공이 되었으니, 이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영월군수 신숙권의 아들 신명화이고, 어머니는 공신(功臣) 집안의 외동딸 용인 이씨이다.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딸(신사임당의 모친)을 결혼시킨 후에도 계속 친정에 살도록 하였기 때문에, 사임당은 어머니로부터 예의범절과 학문을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경전(經典)에 능통하고 글짓기와 글씨, 바느질과 자수까지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신사임당이 7세 때에 안견(조선 시대를 대표할만한, 유명한 산수화가)의 그림을 가져다주었는데, 신사임당이 이를 모방해 매우 절묘한 산수도를 그려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19세 때 사헌부감찰 등을 지낸 이원수와 결혼하였으나 딸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친정에 머물렀다. 하지만 결혼하고 몇 달 만에 아버지가 죽자 3년 상을 마치고, 강릉을 떠나 시댁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얼마 뒤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에 살면서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다. 이 무렵, 셋째 아들 이이(율곡)가 강릉의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는데, 원래 이 건물은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가 처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서울에 살면서도 늘 강릉을 그리워하던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가 수운(水運)의 업무로 평안도로 나가 있는 동안(1551) 병이 들어, 47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芑)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가끔 노닐었다. 그러나 이기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이에 사임당은 남편에게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으며,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큰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후, 대신하여 들어온 계모(繼母)는 성품이 고약하였다고 한다. 그런 데다 술을 좋아하여 해장술을 들고 나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율곡은 항상 약주를 따뜻하게 데워 가서 권하였다. 이러한 정성에 감동된 그녀는 마침내 착한 사람이 되었고, 율곡이 먼저 죽자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3년 상(묘역 근처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영혼을 모시는 일)을 치렀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임당은 현모(賢母)로서 네 아들과 세 딸 가운데 셋째 아들 율곡을 겨레의 스승으로, 넷째아들 이우와 큰딸 매창을 위대한 화가로 키워냈다. 아홉 번이나 장원을 차지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리는 율곡 이이는 호조·이조·형조·병조판서를 지내며, 선조 임금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쳤다. 또 왜적에 침입을 대비하도록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으며, 동인·서인 간의 갈등을 줄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당시 임금이 율곡의 건의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임진·병자 두 대란에 조선이 왜군에 짓밟히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겨레의 지도자를 키워낸 어머니, 그가 바로 신사임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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