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선한 영향력(4)-아우구스티누스(1)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로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성령이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원죄설로서,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의 피를 물려받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구원설로서, 오직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이론을 주창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제국의 세금 징수관이었고, 어머니는 기독교의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 (오늘날 알제리의 수크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집안은 로마인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여섯 살 때 문법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에 취미가 없어 장난에 몰두하였다. 그런 중에도 시 암송이나 웅변 등에는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마다우로스 (알제리와 튀니지의 국경 부근) 로 보내 철학자 아플레아우스 밑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하지만 열여섯 살 때, 가정형편이 기울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부터 불량한 친구들과 사귀어 도둑질과 거짓 연애 등 나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는데, 남의 집 정원에서 배를 훔쳐 먹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어머니는 아들을 죄악에서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집안의 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아버지는 그를 카르타고(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 연안에 위치)에 있는 평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난폭한 학생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대철학자 키케로의철학의 권유란 책을 읽고,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여자들과 사귀는 일에 열중하였다. 열아홉 살 때는 노예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고향을 떠난 지 4년 만에 그는 아내와 세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독교를 버리고 마니교(이단 종교) 신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를 쫓아내고 말았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스물아홉 살 때는 로마의 수사학(修辭學, 말하고 글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 교사로 초빙을 받았는데, 이때에도 카르타고에 와있던 어머니를 속이고 로마로 몰래 도망쳤다. 1년 후에는 다시 수사학 교사로 초빙되어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갔다. 여기서 그는 당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알려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4세기에 활동한 서방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의 강연에 크게 감동하고, 성경 속에 깊은 계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른두 살 되던 해의 늦은 여름,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펴서 읽어라!”라고 하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불현듯 느끼는 바가 있어, 신약성경을 집어 우연히 펼친 대목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낮에처럼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로마서 13:13) 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 곧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물러나, 영세(물로 씻는 의식. 세례)준비를 하였다.

한편, 이미 이곳에 와서 함께 살고 있던 어머니의 권유로 열두 살의 양갓집 딸과 약혼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4년 동안 동거하여 아들까지 있는 여자를 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였다. 약혼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2년 후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아우구스티누스 제2편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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