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선한 영향력(4)-아우구스티누스

아내와 아들(사생아)을 쫓아 보내고 약혼녀마저 멀리한 채,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는 중이었다. 정욕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에게 폰티키아누스라는 한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는 스무 살 때 부모를 잃고 모든 인간의 욕망과 영화를 내던진 채, 산 속에 들어가 수도사의 생활로 일생을 마친안토니우스(이집트의 가톨릭 사제이자 성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깊은 자기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곁에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이때는 법학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고 있던 중)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일어나 천국을 얻는데, 이른바 모든 학문을 닦았다고 하는 우리들은 지금도 혈육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지 않는가?” 그런 다음 아우구스티누스는 , 지금이다. 끊을 때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외치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아들을 위해 30년 동안 정성으로 기도했던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혼을 기다리던 약혼녀에게 파혼을 선언하였다.

이후 그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고 수도원을 창설하였으며, 수많은 책들을 써나갔다. 391년 사제로 임명되고, 395년에는 히포(지금의 알제리 안나바 시 근처에 위치. 오늘날의 히포레기우스)의 주교가 되었다. 반달족(Vandals-게르만족의 한 파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로마까지 침략함)이 그 도시를 점령했을 때에도 그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그가 쓴 책으로는 자유의지와 악의 근원,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이 있는데, 이 저작들은 오늘날 서양철학과 종교적인 정신세계의 제일가는 원천이 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노년에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자신의 죄를 회개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그가 학생시절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한 것, 또는 구구단 외우기에 열중하기보다는 트로이(소아시아에 있는 옛 도시. 그리스가 커다란 목마 속에 30여 명의 군인을 숨겨두었다가, 성을 함락시켰다는 트로이의 목마로 잘 알려져 있음)의 화재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것 혹은 극장에 자주 간 것 등도 모두 죄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젖먹이 때, 젖을 달라고 너무 보채며 큰 소리로 울었던 일조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 그는 소문만큼 그렇게 대단한 악동(惡童)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그가 그토록 후회한, 가령 남의 집 정원에서 배를 서리해먹은 정도의 일들은 그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흔히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학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몰락해가는 로마 제국만큼이나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과 관련된 그의 행동 또한 당시에는 그리 특별난 것도 아니었으리라고 말한다.

그야 어떠하든,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세계는 아버지의 교육열보다 어머니 모니카의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기독교적 교육에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와 달리, 북아프리카의 철저히 기독교적인 집안에서 자라난 어머니는 굳센 신앙과 엄격한 훈육으로 아들을 위대한 기독교인으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아들이 겪은 젊은 시절의 방황을 해산(아이 낳는 일)의 고통만큼이나괴로워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만든 가장 큰 힘으로, 어머니의 기도를 꼽았다. 초대 기독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고대문화 마지막 위인임과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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