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공동체 살림꾼

손 안의 모래 같았다. 움켜쥐었지만 이내 스르륵 빠져나갔다. 코로나19 사태로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은 전 국민에게 지급된 최초의 보편적 현금성 복지혜택이다. 예상했던 대로 반짝 효과였다. 잠깐 숨통이 트이긴 했으나 재난지원금이 소진되자 소비는 다시 축소되었다. 재난상황에서 인간다운 삶을 보호할 수 있는 확고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긴급재난지원금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일시적처방임은 분명하다. 모든 시민이 시군구, 읍면동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 복지급여는 대략 360여가지가 넘는다. 한국은 신청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나 가족이 신청하지 않으면 복지급여를 받을 수 없다. 2018년 국가예산 429조원 중 복지예산은 1462천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34%를 차지하고 있다. 상당한 국가재정이 소요되는 복지분야의 돈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국민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복지효능감이 떨어지니 당연히 세금을 더 내고 싶은 마음도 잘 들지 않는다.

한국은 세금을 통한 복지보다 사보험 의존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나라다. 민영 보험료의 합이 '소득세+사회보험료'를 앞지르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다. 보험이란 미래의 위험에 대한 대비인데, 한국은 사회연대방식이 아닌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매년 사보험 해지로 손해를 보는 규모가 10조원에 달한다고 하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사보험 해지하느라 해마다 10조원도 넘는 돈을 그냥 버리느니, 복지 자금 조성에 쓰는게 100배는 더 이득이다. 그런 낭비를 막은 돈으로 탄탄한 복지 인프라를 만드는데 쓰인다면, 그로 인해 가장 이로운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다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보험을 깨던 사람들일 것이다. 복지는 세금을 통해 실현하므로 국민이 마땅히 분담하는 것인데도 무상복지라는 말을 남발하게 되면 복지는 공짜라는 인식을 확산하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는 실제 복지 발전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복지를 논할 때 반드시 함께 거론해야 하는 세금의 문제, 책임의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복지를 위해 충분히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고 국민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복지를 공짜라 부르건 무상이라 부르건 전혀 상관없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정치가 국민에게 떳떳이 증세를 말하고, 국민이 그 책무를 당당히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복지는 본래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간다.

복지의 민영화, 시장화는 사회 전체의 복지 비용을 줄이는 대신 그 부담을 개개인에게 부과했다. 의료, 주거, 교육 등의 영역에서 개인이 지출하는 복지 비용은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다.복지국가는 재분배의 도구다. 재분배 방식은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정치기획이었던 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들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바탕위에 세워졌다. 정치에 대한 열망과 실망이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한국사회에서 기존의 체제와 구조의 벽은 여전히 단단하고 연대와 협동의 원리가 작동하는 복지국가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사각지대 없이 공적 복지의 영역에서 최대한 많은 시민을 포괄하며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적 복지를 결합함으로써, 광범위한 사회연대를 통한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복지국가'.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절감했듯이 복지의 확대 없이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 복지의 확대를 위해 증세는 필수다. 적극적인 증세없이 국가 패러다임 전환은 어렵다.

결국 세금과 복지의 문제다. 나라의 세금은 누구로부터 얼마나 걷힐까. 또 어디에 얼마나 배분되어 쓰일까. 세금은 국가 경영의 철학을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세금이 어떤 제도와 정책을 발전시키는데 쓰이는지 시민의 눈으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1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럽 복지국가들의 프로세스를 따라가기에 한국의 상황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 경제위기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현실적인 해법이 복지에 있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간절히 필요로 하는 변화는 아래로부터 강제되어야 한다. 세금에 관한 편견과 우상을 걷어내고 증세와 복지 확대를 주장해야 한다. 산발적인 복지담론들을 복지정치의 의제로, 이를 실현한 복지 정치의 주체들이 등장해야 한다. 복지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복지국가에 대한 시민의 열망을 조직하며 사회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정치를 바꾸고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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