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당 이흥규

남방불교는 북방불교보다 12년 늦은 서기 384년(백제 침류왕 원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래하였다. 
이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근거가 뚜렷하지 않아 그가 거쳐 간 지명이나 흔적을 더듬어보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마라난타는 동진(東晋)에서 배를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던 중에 칠산바다에서 풍랑을 만난다. 풍랑에 밀려온 그는 몽넹기의 목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법성포의 숲쟁이 뒤편 바닷가 쇠머리에 닻을 내린다. 목넹기는 한자로 항월(項月)이라고도 하며 홍농읍 칠곡리의 아늑한 해변마을로 법성포 항에서 칠산바다로 통하는 길목에 돌출한 곶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 지명의 어원은「목 넘기기」인데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이 목만 넘기면 산다.」라고 하는 지형적 특수성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목넹기에서 내륙으로 삼백여 미터 안쪽 쇠머리가 불교 도래지이다. 
원래 불가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하는데 불은 부처요, 법은 불경이요, 승은 성인을 말한다. 마라난타가 닻을 내린 이곳의 지명 법성(法聖)은 법(불경)을 가지고 성(성자-마라난타)가 도래한 곳이라는 의미다. 이 법성포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구원을 받는다는 아무포(阿無浦)라고 불렸다가 서기 992년부터는 부용포(芙蓉浦)라는 이름에 밀려 사라졌다. 부용이란 연꽃의 별칭으로 불교에서는 이 연꽃을 신성과 순결의 표상으로 여기며 불상을 연꽃 위에 모시고 불교의 모든 행사에 연화등(蓮花燈)을 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부용포는 다시 법성포로 바뀌었다.
이 도래지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동쪽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데 맨 처음 만나는 곳이 화천리다. 화천리는 화선동(化仙洞)과 천년동(千年洞), 만년동(萬年洞)을 묶어 얻은 이름이다. 화선동의 뜻은 부처님을 믿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신선처럼 되라는 가르침이며, 천년동 뒷마을이 만년동인데 이 지명들 또한 부처님을 믿으면 천년만년 복을 누리고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얻은 지명이다. 만년동 뒷산을 넘으면 삼당리(당집이 셋이 있었던 까닭에 얻은 지명)이며 계속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새미내(새의 꼬리)에서 나룻배를 타고 새목(새의 목 나루 ; 乙津)에서 내려야 한다. 이 나루터 새목이 법성포에서 약 4km쯤 떨어진 곳으로 바로 옆 마을이 홍농읍 단덕리 관음당(觀音堂), 월성국(月聖國), 염주고개 너머 염주동(念珠洞), 성재동(聖在洞)이란 이름의 마을들로 이어진다. 
관음당은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님께 어부들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내던 당집이 있어 얻은 이름으로 부처님과 하느님의 공덕을 함께 비는 특이한 이름이다. 이는 단군 신앙과 불교 신앙이 어우러진 이름으로 깊이 연구해 볼 만한 지명이다. 
월성국은 인조 때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지조 높은 선비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단지동(丹芝洞)이라고 개명하였다. 월성국의 모롱곶이에서 바라보면 마을 앞바다가 마치 연꽃처럼 보이고 전도(前島-월성국 앞바다 가운데 있는 섬)가 마치 연꽃 가운데 앉아계신 부처님처럼 보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염주고개는 염주를 손에 들고 불경을 외우며 넘는 고개이며 염주동은 이 고개 넘어 덕림산의 능선이 마치 소쿠리 모양으로 에워싼 안쪽에 집들이 들어앉은 아늑한 마을로 명지동(明地洞) 이라고도 부른다. 명지동 앞 구슬산 아래에는 성재동(聖在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성인(마라난타)이 이곳에 머물다 가셔서 얻은 마을 이름이다. 이처럼 홍농읍 단덕리에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산재해 있어 불교의 법성포 도래지 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라난타가 단덕리 마래에서 방향을 남으로 돌려 영광 불갑면에 머물며 불교를 전파하고 지은 절이 백제 최초의 절인 불갑사(佛甲寺)다. 불갑사의〈갑〉이란 처음 또는 으뜸을 나타내며 이 땅에서 부처님을 모신 최초의 절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더불어 불갑사 뒷산의 이름도 불갑산이다. 
그 후, 마라난타는 나주와 화순, 보성의 경계인 덕룡산(德龍山) 중턱에 불회사(佛會寺)를 짓고 신도들을 모아 불법을 설파한다. 불회사의 대법당과 상량문에는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영광은 백제 때 무시이군(武尸伊君)이었는데 무시이(武尸伊)를 이두로 표시하면「물」이라고 한다. 이는 이 고장의 자연조건이 만과 개펄과 강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주민들 대부분이 조기, 소금, 조개류 등 바다에서 나는 생산물에 의지해 생활해 나갔기 까닭에 얻은 이름이다. 남방불교가 들어온 뒤에 이 무시이군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있었던 대대적인 군현 정비 때에 무령군(武靈郡)으로 개칭되었다. 무령군(武靈君)은 다시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영광군(靈光君)으로 바뀐다. 무령군의 영(靈)자는 「신령」을 뜻하며 영광(靈光) 역시 「신령스러운 빛」이라는 뜻으로 영광은 신령스러운 빛이 내린 고을이란 의미가 담긴 지명이다.
고려 말 고승 뇌옹화상(瀨翁和尙)이 1350년 6월 중국의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을 때 그 절의 몽당노숙(蒙堂老宿)이 
 “그대의 나라에도 선법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間同與別 靈光宣古通  
 일출부여국 강남해악홍  막간동여별 영광선고통
〈해가 부상국에서 떠서 강남 해악이 붉었으니 같고 다른 것을 묻지 마오.
  영광은 예로부터 뻗쳐 통하였도다.〉라 답하였다 한다. 
이는 영광이 불교와 관련 있는 지명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고사다. 이처럼 마라난타가 이곳에 불교를 전파함에는 어떠한 저항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성인으로 받들며 불법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비록 근초고왕(?~375년)이 마라난타가 도래하기 10여 년 전에 부족국가였던 마한 지역을 통일하였다 하나 이 지역에는 아직 중앙의 통치권이 제대로 미치지 않던 곳으로 백제의 무력에 굴복하여 자치를 빼앗겼던 사람들이 불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바다에 의존하고 살던 사람들에게 불교는 어부들의 안녕과 무사함을 기원하는 신앙심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사료 되며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화선동, 천년동, 만년동, 월성국, 관음당, 염주동, 성재동 등의 이곳 지명들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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