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나쁜 영향력(2)-쇼펜하우어

독일의 민간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는 자유도시 단치히(, 폴란드령 그다니스크)에서 부유한 상인의 1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하긴 했으되, 고지식하고 몰취미하였으며 또 추남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괴테와도 친교가 있었으며, 또 뛰어난 재능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류작가였다. 그녀는 열아홉 살 때, 20년이나 연상인 남편과 결혼하였다.

아버지는 하나 뿐인 아들을 훌륭한 상인으로 키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쇼펜하우어 자신은 학자가 되려고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나의 책략을 썼다. 그것은 온 가족이 유럽을 오랫동안 여행하려 하는데, 네가 상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따라가도 좋다.”고 한 것이다. 2년 동안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쇼펜하우어는 약속대로 함부르크의 유명한 상인에게 가서 견습생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장사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틈나는 대로 책을 읽거나 시내에 나와 강연을 들었다.

그러던 중 열일곱 살 되던 해의 어느 날, 아버지가 상점 창고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죽음은 자살로 추정되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악화되는 귀머거리 증세, 부부 갈등, 우울증 등으로 심각하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를 격렬히 비판하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한탄해대는 아들을 못 견뎌했다. 그녀에게 아들은 언짢은 밤과 악몽을 가져다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애초부터 돈만 바라보고 사랑 없이 결혼을 하였던 어머니는 막대한 유산을 챙겨, 연애생활에 가장 적합한 바이마르(문호 괴테와 실러, 철학자 니체 등이 이곳에서 활약) 지방으로 옮겨가서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한바탕 싸우고 나서 서로 헤어져 살기로 한다. 이때부터 그는 정해진 면회날짜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손님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그는 스물 한 살의 성년이 되자 어머니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유산의 3분지 1을 받아냈다. 쇼펜하우어는 그 유산을 가지고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1813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유명인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비웃음뿐이었다. “어떤 철학을 선택하느냐는 바로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다.”고 한 피히테(독일의 애국주의 철학자)의 말은 쇼펜하우어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그의 인품이 특이하게 형성된 것은 이러한 가정환경 탓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이자 지칠 줄 모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는 벌써 이때에 그 터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미워하는 첫 번째 대상은 철학교수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여성이었다. 그는 어머니와의 좋지 않은 관계로 인하여 여자를 인간적 불행의 근원으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여자들의 특징이란 미치광이에 가까운 낭비벽과 본능적인 교활함, 그리고 뿌리 뽑기 어려운 거짓말습관이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쇼펜하우어는 이를 피해 달아났다. 멀리 프랑크푸르트까지 가서는 그곳에서 두 개의 방을 빌렸다. 그리고는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직장도 조국도 없이, 오직 조그마한 삽살개 한 마리와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죽은 후, 그의 모든 재산은 유언에 따라 자선단체에 기증되었다. 오늘날 그의 무덤 앞에 세워진 검은 대리석 묘비에는 외롭게 그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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