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1)-‘범생’ 공자

위대한 철학자들의 어린 시절 모습은 어땠을까? “잘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개과천선(改過遷善-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 착하게 됨)했다.” 가운데, 어느 편에 속할까?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자 중에도 아주 뛰어난 경우와 평범한 경우, 그리고 정반대로 문제를 일으키고 다닌 경우가 두루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매우 의젓하여 장차 성인군자에 걸맞은 행동을 한 경우는 아마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대표적이 아닐까 여겨진다.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공자는 중국 노나라의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 높지 않은 계급의 무사(武士)였다. 거대한 체구를 가졌던 그는 노나라 군이 적군의 성 안에 갇힐 위기에 놓이자, 아래로 내려오는 성문을 그냥 팔로 받쳐 아군을 달아나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숙량흘은 노나라의 시()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9명의 딸을 낳았다. 아들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첩이 맹피(孟皮)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이 아들은 다리 병을 앓다가 일찍 죽어버렸다. 이에 숙량흘은 안 씨의 셋째 딸인 안징재와 이렇다 할 혼례도 없이 혼인하여 공자를 낳았다.

70살이 넘은 아버지와 16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공자는 부모와 함께 노나라 서울인 곡부 근처의 니구산(尼丘山)에서 살았다. 무녀(巫女-무당)로 추측되는 어머니 안징재만 거기서 살고, 아버지인 숙량흘은 가끔 찾아오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부친은 결국 공자 나이 세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이 때문에 공자는 열여덟 살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아들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녀는 남편을 공자의 할아버지가 살던 곳에 장사지내고(공식적인 장례식에는 참석치 못했다는 설도 있음), 절기에 맞추어 집에서 정성껏 제사지냈다.

그런데 이를 항상 주의 깊게 보아오던 공자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제기(祭器-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흉내를 내곤 했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늘 예()를 갖춤으로써 매우 어른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공자는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몸으로 부대끼는 잡다한 일을 해야만 하였다. 이에 따라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한 것으로 짐작되나, 공부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 스스로 “10여 호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나만큼 성실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본격적으로 학문에 뜻을 세운 열다섯 살 이전에 이미 학문에 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산(防山-곡부 동쪽 20)에 묻힌 아버지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몰랐던 공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거리에 빈소(殯所-상을 당하여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놓아두는 곳)를 차렸다. 이때 어떤 나이 많은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었고, 공자는 이에 비로소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할 수 있었다. 공자는 생계를 위하여 노나라의 3대부 가운데 하나인 계손 씨(당시 노나라는 맹손, 숙손, 계손 씨의 세 집안으로 권력이 나뉘어있었음) 집안에서 양곡을 관리해주었다. 이때 충실하게 일을 보아준 결과, 얼마 후에는 목장관리인으로 승진할 수 있었는데 역시 가축이 잘 번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주공(周公-기원전 12세기에 활동한 중국 주나라의 정치가)을 제사지내는 태묘(太廟)에서 조그마한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말하기를 나는 길을 갈 때 한 가운데가 아닌 담장의 가장자리를 걸어 다녔기에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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