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2)-‘범생’ 주자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만들어낸 주자(朱子, 1130~1200)는 중국 송나라 고종 때에 휘주(종이···벼루의 재료가 되는 목재와 석재 등이 풍부하여 상업이 발달. 지금의 안후이성 최남부와 강서 동북부를 관할한 행정구역)의 무원(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알려진 곳)에서 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송은 난젠의 3선생가운데 한 사람인 나예장(본명은 나종언)의 제자로서, 일찍이 사훈이부랑의 벼슬을 지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금나라(여진족이 세운 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다가 좌천되어 은거하였다. 그러므로 주자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관직을 떠나 있었던 셈이다.

매우 강직하고 곧은 성품의 아버지 아래에서 주자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것이 하늘이란다.”라고 하자,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럼 저 하늘 위에는 또 무엇이 있습니까?”

다섯 살 때는 유교 윤리의 핵심인 효()의 원칙과 규범을 수록한효경(孝經)을 읽고, 책머리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한다. “만약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주자는 다른 아이들과 놀 때에도, 혼자 조용히 앉아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상고시대에 복희씨가 지었다는 여덟 가지의 괘, 즉 팔괘(八卦)를 그리곤 하였다. 주자는 열 살 때 유학의 경전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공자를 숭배하였다. 그는 만약 하늘이 공자를 낳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밤처럼 어두웠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장차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주자는 공자가 엮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역사책춘추(春秋)는 물론 불교와 노자의 책을 다 읽어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스물네 살이 되자 절절히 우러나오는 구도(求道)의 마음을 누를 길 없어, 수백 리 길을 걸어가 부친과 함께 공부한 이연평 선생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연평은 명예나 재물에는 관심이 없어 40여 년 동안을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낙학(洛學-사람과 사물이 본래 똑같은 성품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리학의 한 학파. 정호, 정이 형제의 고향이 낙양인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함)을 소화시켜 실제생활 가운데서 체험하며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주자가 이연평을 만나 본 후, 탄식하기를 선생님을 만나 뵙고, 이전에 불교와 노자의 학설을 여기저기 연구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고 말했다. 이연평 역시 주자를 보고, 칭찬해마지 않았다. “그는 품성이 우수하고 부지런히 힘써 공부하니, 나예장 선생 이래로 이렇게 뛰어난 인재를 본 적이 없다.”

이리하여 주자는 불교와 노자 사상의 허망한 이론을 포기하고, 북송(北宋)의 정호와 정이천 형제가 연구한 낙학을 일생의 학문적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어렸을 적 장차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이 되어야겠다.”고 한 주자 자신의 맹세는 그로 하여금 위대한 사상가가 되게 하였다.

주자는 정호와 이천, 두 형제의 학문에 주렴계와 장횡거의 학설을 종합하여 그 유명한 주자학(성리학)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도리, 즉 삼강(三綱)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어짊과 의로움, 예절과 지혜, 신뢰의 오상(五常-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을 영원불변한 도덕원리로 정착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모든 봉건사회의 질서를 규정짓는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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