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3)-‘범생’ 헤겔

헤겔(1770~1831. 변증법적 관념론을 완성시킨 독일의 철학자)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국세청 공무원의 2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유하고 재능 있는 숙녀로서, 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칠 정도였다.

헤겔은 다섯 살에 라틴어 학교에, 일곱 살에는 김나지움(독일의 중·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여러 분야에서 상을 타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리스의 유명한 비극안티고네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 그에게는 위대한 철학자의 자질이 보였다. 하루에 일어난 일을 꼼꼼히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읽은 책은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색인표(순서에 따라 제목을 표로 정리한 것)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평생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헤겔이 만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레플러 선생님이었다. 선생은 그에게 성경, 그리스의 고전, 셰익스피어 희곡 등을 감명 깊게 가르쳤으며, 또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작품집을 선물로 사주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당시 헤겔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레플러 선생님은 매우 성실하고 공평하셨다. 학생들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일이 유일한 바램이셨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내 곁에 와 앉으셨고, 나도 또 여러 번 선생님 곁에 가서 앉았다. 이제 선생님은 가시고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리라.”

영리하고 지적(知的)인 학생 헤겔은 그러나 손재주가 없어, 체조나 운동은 아예 못하였다고 한다. 발표 실력도 형편이 없어, 낭독 시간이면 항상 발표 태도나 목소리 때문에 지적을 받곤 하였다. 이는 나중에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헤겔은 그 해 가을에 온 힘을 다해 신학만 전공할 것이며, 신학과 관계없는 직업에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 굳게 약속하고, 신학교인 튜빙겐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철학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철학에 정진함으로 인하여 결국 지켜지지 못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같은 나이의 횔덜린과 다섯 살 아래의 조숙한 천재소년 셸링과 친하게 지낸다. 나중에 시인이 된 횔덜린 역시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그리스어·철학·시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그는 헤겔을 침착하고 분별 있는 친구라고 말하며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헤겔 또한 횔덜린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런 까닭에 헤겔의 철학은 횔덜린과의 교제로부터 파악되어야만 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이다. 셸링(독일 관념론 철학 및 자연철학의 대표자)은 일찍부터 두드러지게 재능을 나타냈으며, 오히려 선배인 헤겔을 리드해나갈 정도였다. 반면, 헤겔은 이 대학에서 이렇다 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성적도 철학을 제외하고는 평균 점수 이하였다. 묵직하고 침착하며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헤겔을 두고, 학교 친구들은 노인(할아버지)’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헤겔은 친구들과 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학생동맹을 맺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뒷날 프러시아(독일의 전신)를 대표하는 국가철학자로, 독일 철학의 태두로 살아생전에 최고의 명성을 누린 철학자 헤겔의 생애는 그의 중·고등학교 시절에 충분히 예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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