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4)-‘문제아’ 에피쿠로스, 안셀무스

철학자들 모두가 모범생이거나 의젓했던 것은 아니다.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맹자가 어렸을 적 말썽꾸러기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확인한 바 있다. 쾌락주의의 시조 에피쿠로스는 열네 살 때 처음 철학을 공부했는데,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세계는 끝이 있을까?’ 와 같은 엉뚱한(?) 물음을 던졌다. 철자와 문법만 열심히 가르치던 교사들이 이 물음에 제대로 답했을 리는 만무하다.

열여덟 살 때, 에피쿠로스는 교육의 도시 아테네로 향했다. 이곳에는 플라톤이 세운 인류 최초의 대학 아카데메이아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건립한 리케이온 등 유명한 학교들이 있었다. 물론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도 마음에 드는 교사를 만나지 못했는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나의 스승은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심지어 그는 무녀(巫女, 무당)였던 자기 어머니의 주술(呪術)마저도 부인하였는데, 여기에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기계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요괴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을 공부하여 헛된 망상과 미신을 쳐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지도 않거니와 죽음 후의 세상, 즉 사후(死後)의 세계도 없다. 이러한 논리로부터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그의 쾌락주의가 나온 것이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출신의 스콜라 철학자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고집스러운 아버지와 많은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열다섯 살 때 안셀무스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의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이때 어린 안셀무스는 꾀를 하나 생각해내었다. 자기에게 병이 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열정에 감동한 수도원장이 자신을 받아들여줄 것으로 여겼던 것. 그리하여 실제로 안셀무스는 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치를 심하게 보았던 수도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안셀무스는 건강을 다시 회복하는 도리 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그는 즉시 병에서 나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무렵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고 사망하자, 안셀무스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집을 떠나 3년 정도 프랑스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이 동안 스승인 란프랑크를 만나고, 그의 추천을 받아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입학하게 된다. 꾀병 흉내를 내면서까지 들어가고자 했던 어렸을 적 꿈이 달성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체계적이고도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의 수도원장 자리에 오른다. 1070년 영국의 왕이 된 윌리엄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 란프랑크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다. 그리고 안셀무스는 스승의 후계자로 영국 국왕 다음의 권한을 가진 최고위 성직자캔터베리 대주교로 지명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때 그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고집을 부렸다. 교황의 구두 동의를 받고서 부임하긴 했으나, ‘영국 국왕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안셀무스는 이후 두 번이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로서의 삶이 행복하진 못했으나, 마침내 그는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위대한 신학자로 기록되었다.(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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