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과 문제아(5)-‘문제아’ 마르크스

우리에게 공산주의 사상가로 잘 알려진 칼 마르크스(1818~1883, 철학자이자 경제학자)는 독일의 라인 주 트리어 시에서 유대인 가정의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계몽주의적인 사상에 심취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는 않았으되, 대식구의 생활을 그런대로 잘 꾸려나가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유태인에 대한 불이익을 피하고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직전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마르크스 역시 6살이 되던 해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12살 때, 마르크스는 김나지움(우리의 중·고등학교에 해당)에 들어가 라틴어와 역사, 철학 등을 배웠다. 이 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Bonn)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법률가로서 안정된 생활을 누린 아버지 덕분에 마르크스 또한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라 대학생이 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이때 그의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있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세세한 당부의 편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아들아. 청소를 사소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건강과 쾌적함은 바로 그것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주 수세미와 비누로 깨끗이 문질러 닦도록 해라.” 그녀가 이러한 편지를 쓴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니, 마르크스의 생활 자체가 정리 정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의 대학에는 학생 감옥이란 게 있었다. 대학생이 술에 취해 누구를 때리는 등의 경범죄를 지었을 때, 경찰을 대신해 벌을 내리기 위해서다. 죄의 경중에 따라 하루에서 30일간 가두었는데, 처음 3일 동안은 물과 빵 외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른 음식이나 술도 허용되고 수업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오히려 낭만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 감옥에 마르크스도 들어갔는데, 그 죄목은 고성방가(高聲放歌) 및 음주, 싸움질 등이었다. 이밖에 그는 금지된 무기를 갖고 있다가 고발당하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로 빚을 지기까지 한다.

(Bonn) 대학에서 1년 동안 공부를 한 후, 마르크스는 베를린대학 법학부로 전학하여 법학과 역사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헤겔의 철학에 큰 관심을 쏟았다. 소장파 젊은 학자들이 운영하던 박사 클럽에도 참여하였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 모임의 정신적 지도자까지 되었다. 그곳에서 밤낮없이 토론에 열중하였던 바,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사상의 창고라거나 이념의 황소대가리라고 불렀다.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학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생활 역시 아버지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학문의 모든 분야를 어정쩡하게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침침한 석유등잔 아래서 애매모호한 야심을 품고 학자 차림으로 망나니짓을 하는 놈, 예의라고는 털끝만큼도 모르는 제멋대로 된 녀석이라는 욕을 먹게 된다.

그러나 23세 되던 해인 1841, 마르크스는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독일 대학에는 수강 신청이나 출석 체크가 없다. 출석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시험에만 합격하면 되는 것이다. 시험에 자신이 없으면, 다음 학기로 미루어도 된다. 시험은 원칙적으로 구두시험이다. 하지만 학생 수가 많을 때에는 필기시험을 보기도 하는데, 노트와 책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대신 3시간이 걸릴 정도로 어려운 문제가 출제된다.(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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