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규 시인

20세기 초까지도 홍농읍은 삼면이 바다여서 섬이나 다름없는 반도였다. 홍농읍의 전체적인 지형은 육지로부터 서해 칠산바다를 향하여 기상이 늠름한 적토마가 달려온다는 의미로 말마(), 올래() 자를 써서 마래(馬來)라고 하였으며 마래 잔등(작은 등성이) 아랫마을 지명이 마래(馬來). 이 마래(馬來) 반도는 황금어장인 칠산바다로 열린 리아스(Rias)식 해안으로 개펄에만 나가면 각종 먹거리가 널려있었던 고장이다. 그래서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영광군에서 홍농읍에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지석묘는 봉대산 기슭에 마치 장기판처럼 45기가 집중되어 있어 근동 사람들은 장기바위라고 부른다. 홍농의 지석묘는 모두 60기이다. 특히 마래마을의 거대한 지석묘는 넓은 지역의 많은 무리를 거느리던 대 부족장의 묘로 짐작된다.

아주 좁은 마래(馬來) 능선이 육지와 연결되어 겨우 섬을 면한 홍농은 금정산, 봉대산, 망덕산, 덕림산 기슭의 언덕배기에 밭뙈기를 일구어 채소나 양념거리를 심을 수밖에 없는 비탈진 박토여서 주민들이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거나 개펄에서 조개류나 김, 미역, 다시마 등 바다풀을 뜯어 연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어찌하여 클 홍() 농사 농() 자의 지명으로 부르게 된 것일까?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1623~1649년 재위 27) 때 병마절도사 이란 장군은 춘신사(春信使)란 명칭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역관을 앞세운 친명파들의 모함으로 옥사한다. (1628) 그 후 그에게 씌운 죄가 모두 모함이었다는 사실로 밝혀지자(1639) 이듬해 봄에 인조는 국풍(國風) 이석우에게 명하여 이란 장군의 고향에 묘소를 잡아주도록 하고 사패지지(賜牌之地-나라의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땅)를 하사(下賜)한다. 국풍(國風)이란 왕을 모시는 능소(陵所)만을 잡는 지관을 말한다. 왕명을 받은 국풍 이석우가 영광 고을의 지형을 샅샅이 누비던 중 법성포 뒷산인 인의산에 올라 북쪽 지세를 바라보니 마래면은 서쪽으로 벋은 긴 반도의 남쪽과 북쪽 바다가 나중에 육지가 되어 이곳은 장차 큰 농사를 짓는 고을이 되리라고 예언하여 <홍농(弘農)>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뒤 마래면은 지명이 홍농면으로 바뀌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홍농 반도의 남쪽 바다는 일본인 삼기가 법성 쇠머리와 홍농 매물고지를 막아 간척지 농토로 변하였고(1925), 북쪽 바다는 홍농 질마지의 신지와 용의 형국인 상하면 자룡마을의 용머리를 잇는 무냉기를 막아 이 또한 간사지 농토가 되어 비로소 큰 농사를 짓는 고을 홍농(弘農)이 된 것이다. 국풍 이석우가 예언한 뒤 꼭 285년 만에 비로소 홍농이 되었다. 그러니까 풍수장이 이석우는 300년 후의 지형을 예견한 것이다.

남북 바다가 육지로 변한 홍농은 달리는 적토마(赤土馬)가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칠산바다로 내닫는 기상이 드러남으로써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홍농으로 재탄생(再誕生)한 자연환경이요, 자연경관이다. 더불어 계마리의 계동(桂洞), 안마(安馬), 용정(龍井) 마을의 땅밑 즉 말 앞다리 밑의 지질이 단단한 암반으로 굳어있어 웬만한 지진에도 흔들림이 없는 지형이어서 1970년대 초에 영광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며 이 마을들이 발전소의 터전이 된 뒤 인구가 급격히 늘어 홍농읍으로 승격되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