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신체, 체질(2)-왕양명

중국의 철학자 왕양명(1472~1528)의 원래 이름은 운()이었다. 그러나 다섯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자, 그의 할아버지가 수인(守仁)으로 이름을 바꾸어주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양명자(陽明子)라 칭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양명 선생이라 불렀던 것이다.

명나라 헌종 때에 절강성 소흥부에서 태어난 양명은 명필 왕희지의 후예였다. 왕희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예가로서 길을 걸어갈 때나 앉아서 쉴 때나 언제나 손가락으로 붓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손가락으로 옷에다가 한 획 한 획 그려보곤 했는데, 나중에는 옷이 닳아서 구멍이 났다고 한다. 또 붓글씨 연습을 끝낸 후에는 붓과 벼루를 집 앞에 있는 연못에서 씻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 연못물이 다 검어졌다고도 한다.

왕양명의 아버지 화()는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남경이부상서(오늘날 장·차관급)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양명은 그 어머니가 임신 8개월 만에 조산(早産)했기 때문에, 몸이 약해 이미 청년기에 폐병으로 피를 토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양명의 나이 열일곱 살 되던 해 7, 결혼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결혼식이 있던 날, 그는 혼자서 부근의 철주궁(일종의 도교사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 도사 한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호기심에 이끌린 그는 그 도사에게 물어보았다.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 즉 양생(養生-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함)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조용히 앉아 그것을 배우느라 집에 돌아갈 일도 잊고 말았다. 화려한 신방에서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야 할 신랑이 결국 생면부지(生面不知-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도사와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또 그가 입산(入山)하려고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도 있다고 전해진다. , 양명은 스무 살에 향시(鄕試-과거 시험에서의 제1차 관문. 여기에 합격하여야 회시에 응시할 수 있고, 이 회시에 합격하여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음)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4년 후에 응시하였으나 또 떨어졌다. 자신의 재주만을 믿고 남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마침 폐병에 걸렸고, 그리하여 산 속에 들어가 양생법을 공부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양명의 나이 56세 때에는 광서 지역에서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곳 총독이 이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양명을 총독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양명은 이 무렵 폐병에 이질(痢疾)까지 겹쳐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명은 할 수 없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서로 향했다. 양명이 그곳에 도착하자, 반란군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반항이 그곳 관리들의 악정(惡政-악독한 정치) 탓임을 알게 된 양명은 태장(笞杖-작고 가는 가시나무 회초리로 볼기를 치는 형벌. 이에 반해, 큰 형장으로 볼기를 치던 형벌은 장형이라 부름) 100 대씩으로 다스려 그 죄를 벗게 해 주었다. 또한 그는 학교를 세워 교육과 교화에도 힘썼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은 데다 과로까지 겹쳐, 양명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도적 떼를 몇 번이나 토벌하고 난을 평정하는 동안 양명의 기력은 모두 소모되고 말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날 때부터 선병질(腺病質-결핵성 질병을 가진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증세)인 데다 더욱이 학문과 사색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몸이 더욱 허약해져 결국 몸에서 피를 토하는 각혈병(咯血病-폐나 기관지점막 등에서 피를 토하는 병)을 얻고 말았다.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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