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주황색의 엷은 껍질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부드러운 곡선 넉넉한 볼륨의 새하얀 속살 그 부드러운 곡선과 순백의 살결이 너무도 매끄럽고 탐스러워.

손으로 만지기조차 아깝지만 어떤 신비감에 이끌려 한 겹을 벗겨내고 나면 크기만 작아질 뿐 여전히 순백의 곡선이다.

한 겹 두 겹 자꾸만 벗겨내도 똑같은 살결을 드러내는 양파의 속성이다.

어째서 양파의 속은 하얀 색일까?.

뇌가 없는 양파는 어떻게 그 풍만한 몸집에 하얀 피부로만 성장할 수 있을까?

무뇌의 생명체인 양파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파의 껍질을 벗겨내듯 인간의 껍질(관념, 의식, 사상, 양심)을 벗겨낼 수도 있을까?

그렇게 그 속을 낱낱이 까발리면 그 속은 무순 색일까?

인간이 껍질(권력의 옷:관복)을 벗기 전엔 어째서 그 속살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걸까?

권력의 옷을 벗겨내고 그 속을 파헤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대선 후보 이재명의 권력과, 윤석렬의 권력과, 안철수 심상정 등 그외 후보들의 권력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과 윤석렬 후보 지지자들의 맹목성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차이가 있다면 또 그 것은 무얼까?

3지대 유권자(부동층)들의 고뇌는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한 것일까?

양파처럼 겉부터 속까지 완전히 들여다 볼 수 없는 인간(검사, 판사, 정치인, 언론 등 기타 권력)에게 서로 협력하여 인간을 심판하도록 하는 것, 특히 결코 완전한 존재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는 판사(사법부)에게 최종 판결권을 주고 그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 판결의 옳고 그름의 기준()인 법의 가치는 또 무엇이며?

어떻게 그 활용(오용, 악용)을 믿을 수 있을까?

그래도 절대 다수의 국민은 그 판결을 믿고 따라야만 되는 걸까?

자색 양파의 출현은 백색이기만 했던 양파의 종에 대한 반란일까? 혁명일까? 진보가 윤석열을 지지하고, 전라도에서 윤석열을 지지하고, 보수가 이재명을 지지하고, 경상도에서 이재명을 지지하면 반란일까? 혁명일까?

진보는 어째서 진보이고, 보수는 어째서 보수일까?

진보와 보수는 적일까? 동반자일까?

진짜 진보와 보수는 정말 따로 있는 것일까?

여야 정치인들이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나 생각이 절대 가치라고 정말로 확신 하는걸까?

그 확신을 한 번이라도 의심해 본 적은 없을까? 검정색 짙은 색안경을 끼고 껍질 벗긴 양파를 보면 무순 색으로 보일까?

우물 안에서 올려다 보는 하늘의 크기는 얼마만큼일까?

어째서 인간의 생각에는 관성(慣性)에 대한 제어장치가 견고할까?

양파에게도 인간의 뇌처럼 집요한 관성의 통제에 갇혀 있었다면 자색양파의 출현이 가능했을까?

어째서? 독감 바이러스로 죽는 것은 조용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요란할까?

뇌가 없는 양파는 드디어 백색만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색 종의 혁명까지도 이루었는데 인간은 어째서 기존의 생각(고정관념)에만 얽매여 살까?

본질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할까?

시장골목의 허름한 팥죽집에서 대통령 후보와 일반 서민이 먹는 팥죽의 맛은 어떻게 다를까?

윤석열이든 이재명이든 안철수든 심상정이든 그 외 어떤 대통령 후보든 당선된 후에도 선거전에서처럼 국민 앞에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째서?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함 없이 지켜야 할 것은 쉽게 변해버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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