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왕족 의천

오늘날 금 수저흙 수저니 하는 말들이 유행하는 까닭은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 출생 환경이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과연 위대한 철학자들의 경우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의 11대 왕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의천을 제외한 위의 세 형은 모두 왕위에 올랐다. 의천이 승려가 된 데에는 아버지이자 왕인 문종의 뜻이 담겨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은 1067년 흥왕사를 세우고, 자신의 아들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서약하였다. 그리고 태자를 출가시키니, 그가 바로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그런데 문종은 여섯 째 아들까지 출가를 시켰다. 물론 왕의 불심(佛心)이 깊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왕자를 통해 불교를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왕자는 그가 가진 특수한 신분 때문에, 빠른 기간 안에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열한 살의 나이에 출가한 의천은 불교의 모든 경전을 독파하고 나아가 유학 경서들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에까지 두루 통달하였다. 영특한 자질에 왕자의 특권까지 더해진 의천은 출가 2년 만에 불교계 최고 지위인 승통(僧統, 왕사나 국사가 될 자격을 부여받음)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의천은 송나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싶다는 염원을 품게 된다.

의천의 소망은 아버지인 문종과 큰형님인 순종이 연달아 사망하고 둘째 형이 선종으로 즉위한 후에야 이루어진다. 물론 이때에도 신하들의 반대에 부닥쳤는데, 의천은 둘째 형인 선종과 어머니에게 달랑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밀항을 통해 송나라로 떠나갔다. 왕명을 어기고 몰래 출국하는 것은 죽어 마땅한 죄였다. 하지만 의천은 왕자이자 왕의 동생 신분인지라, 처벌은커녕 도리어 왕이 관리를 파견해 그의 시중을 들게 했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송나라의 황제 철종은 의천을 수도인 변경(汴京)의 한 절에 머무르게 하고, 불심이 뛰어난 양걸(楊傑)이란 인물을 영접사로 임명하여 의천과 동행하도록 했다.

이웃 송나라에서 불법(佛法)을 폭넓게 공부한 의천이 드디어 귀국할 때가 되었다. 의천을 태운 배가 예성강 포구에 도착하자, 선종은 친히 마중을 나가 성대하게 환영의식을 치렀다. 이때 의천은 불경과 경서 1천 권을 왕에게 바쳤다. 동시에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사들인 4천여 권의 책을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한편, 향년 46세로 세상을 떠난 선종의 뒤를 이어 14대 헌종(의천의 조카)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의천은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등에 머물렀다.

그러나 나이 어린 헌종은 즉위 5개월 만에 삼촌인 계림공(의천의 형. 왕위에 올라 숙종이 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불과 14세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이 사건에 숙종 일파가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여, 숙종에게는 친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오점이 남아있다. 그런데 의천은 이때 형인 숙종 편에 섰다. 사실 화엄종에 속해 있던 의천이 천태종(天台宗, 나중에 조계종 등과 함께 선종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짐)을 창건한 것 역시 그로써 숙종을 후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후로 의천은 불교를 통합하여 왕권을 강화하도록 하고, 화폐의 유통을 주장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쓴 엽전)가 사용되게도 하였다. 동전 유통을 통해 이익을 창출해 나라의 곳간을 풍족하게 하자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 사고였다. 47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 의천은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시호를 받았다.(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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