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4)-플라톤

비록 왕이나 왕족 출신은 아니지만, 명문귀족 출신의 철학자들도 꽤 많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플라톤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80년의 생애 동안 30여 편에 달하는 대화록을 남겼는데, 그 안에 담긴 이데아론(형이상학), 국가론(정치학) 등은 고대 서양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라톤은 기원전 427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설적인 왕 코드로스의 자손이고, 어머니는 그리스 7현인 가운데 한 사람인 솔론의 후손이었다. 아테네의 왕 코르도스는 도리아인들이 아테네를 침입할 무렵, “아테네의 왕이 다치지 않으면, 침입은 성공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받았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스스로 죽기를 각오한 코드로스는 농부로 변장하고, 강을 건너 도리아 진영 근처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도리아 병사들을 화나게 한 다음 처형을 당했다. 나중에야 코드로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리아인들은 예언된 패배를 두려워하여 아테네 침략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솔론은 아테네인들이 전쟁에서 패배해 낙심해 있을 때, “일어나 살라미스로 가자. 그 아름다운 섬을 찾아 수치를 씻어내자!”고 촉구하는 시를 대중 앞에서 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시 시작된 전쟁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고, 솔론은 최고통치자인 아르콘의 직책에 올랐다. 그가 취한 여러가지 개혁조치 가운데에는 빚 때문에 노예로 전락한 시민들을 해방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처럼 플라톤은 친가 쪽이나 외가쪽 모두로부터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았다. 다만 어머니의 친오빠와 사촌오빠는 공포정치를 자행한 ‘30인 과두정권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플라톤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다음, 페리클레스(아테네의 최고지도자)와 매우 친했던 퓌릴람페스와 다시 결혼했다. 어떻든 플라톤은 어려서부터 유명 작가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레슬링 선수로부터는 몸을 단련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 플라톤은 비극경연대회에 나갔다가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게 된다. 이에 커다란 감명을 받은 그는 가지고 있던 비극대본을 불태워버린 다음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의 고상하면서도 겸손한 인품에 사로잡혀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까지 그를 정성껏 섬겼다.

두 사람의 생애 동안 아테네의 정치상황은 혼란하기 그지 없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아테네 안에서는 민주주의 세력과 귀족주의 정파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옹호자로 선포한 다음 본보기로 그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실망하고 분노한 플라톤은 아테네를 훌쩍 떠났다. 그후 메가라,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집트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가지 사상을 배우고 익혔다. 마흔 살이 넘어 고향땅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인류 최초의 대학이라 일컬어지는 아카데메이아를 세우고, 남은 생애 동안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이전에 플라톤은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꿈을 안고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로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독재지도자 디오니시오스 2세는 플라톤의 꿈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모함하여 감옥에 집어넣으려 하였다. 이에 플라톤은 고향으로 돌아와 모든 시간을 아카데미아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바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철학자가 왕이 되든지, 왕이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나 시칠리아 섬을 두 번씩이나 방문하여 이상국가 건설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정치에 대한 그의 미련을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영광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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