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8)-아리스토텔레스

명문귀족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철학자들이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플라톤의 수제자이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라는 마을에서, 시의(侍醫-왕의 주치의)였던 아버지와 부유한 가문의 후손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왕궁 근처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였으며, 의학이나 자연과학의 저술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집안은 대대로 자손에게 해부학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러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는 아들의 학문 연구를 위해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아테네로 가고 싶어 했다. 가족들은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신탁(神託-어떤 문제에 대해 신이 대답해주는 일)에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철학을 공부하라!”는 신의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에 아테네로 유학을 가 플라톤의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하였고, 결국 플라톤이 가장 아끼는 수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승이 죽은 후아카데미아의 새 원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스승의 생질(甥姪-누이의 아들)로서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일로 속이 상한 데다 평소부터아카데미아의 학풍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던 터라 그곳을 떠나고 만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난날아카데미아에서 함께 공부했던 헤르미아스 군주의 궁전으로 초빙되어 갔다. 그는 아소스(터키 서부 해안의 항구도시에 있는 유적지)아카데미아의 분교를 세우고, 3년 동안 강의를 하였다. 그 동안에 헤르미아스 군주의 조카이자 양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었다. 뒷날 그녀가 죽고 같은 고향 출신인 여인과 다시 결혼하여 니코마코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으로부터 당시 13세인 왕자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초빙되었다. 필립 왕은 당대 최고의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초청하여 왕자의 선생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 외곽에 있는 뤼케이옹 광장에 학원을 세우고 오직 학문연구에 온 힘을 기울이는 한편,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가 나무가 우거진 가로수 길을 제자들과 더불어 산책하면서 강의하였기 때문에, 그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학원 안에 많은 책들을 모아놓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수많은 지도와 외국의 헌법, 동식물의 표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큰돈을 기부하였다. 또한 마케도니아 안의 모든 사냥꾼이나 어부들에게 학술적 가치가 있음직한 것은 무조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내도록 명령을 내려놓았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많은 분야에 있어서 그토록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왕에 의해 제공된 풍부한 자료 덕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의 물건들을 충분히 갖는 것도 행복의 조건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호화로운 저택에서 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었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반지를 끼고 머리를 손질하는 등 남달리 몸치장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평생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은 철학자라고나 할까? (저서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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