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친일문학론을 처음 손에 쥔 것이 2002년 무렵이니 벌써 20년이 지났다. 당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발족하면서 기념사업으로 찍은 책이 바로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이다. 문학이라는 우수한 정신 고양서를 통해 일본에 영혼을 바친 문학인들의 모습이, 현 정권에 용비어천가로 마음을 바치고 있는 대다수 언론과 너무도 닮았기에 다시 꺼내 보는 책이기도 하다. 친일문학론은 일본과의 한일기본조약을 맺은 이듬해인 19668월경에 첫 발간 되었다. 친일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문학인의 친일 행각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강점기에 매국성향 신보와 신문에 발표했던 글을 수집하는 한편 각종 문학지에 실린 친일 성향의 글을 채취했다. 1966년에 첫 간행이 되었고 1977년에 중판을 발행했다. 당시 나는 이 책이 재출간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예약 후, 약 한 달 정도를 기다려서 받았다. 일방적인 황국사관과 그에 준하는 반공 사관으로 세뇌가 된 우리 세대는 친일문학가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그리고 친일을 했다는 문학인이 이광수 외에 누가 더 있었는지 궁금했다. 궁금증의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가 학교 정규 교과서에서 익혔던 대부분의 이름을 이 책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문학을 동경하고 시인을 꿈꾸던 작가 지망생들이 밑줄을 그어가며 외우고 음미했던 글들이 친일문학가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임종국 선생은 당시 서슬이 퍼렇던 일본군 장교 출신의 군부독재 아래에서 친일문학을 추려냈던 것이다. 친일파라는 개념조차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생의 선구적인 용기는 난관을 뚫고 친일인명사전까지 다리를 놓아 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황국 문학관과 황국사관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 정도가 아니라 정치의 중심부에서 무섭게 요동치고 있다. 더욱 무서운 건 이들이 이젠 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쟁 책임자와 친일파를 전혀 손조차 대지 않은 역사를 그들이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이유이다. 친일문학가와 황국사관의 계승자들이 우리에게 뿌린 씨앗은 불사초가 되었다. 국가의 존망보다 자신이 속한 단체 혹은 개인의 욕망과 이권이 우선하는 사회는 여기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현재 대한민국은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서민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고물가도 문제지만 미국 측 연리에 따른 차후의 금리가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올 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오로지 전 정권의 수사에만 전념하고 있다. 여기에 여당은 당권 싸움으로 날 새는 줄 모르고 젊은 정치인 한 사람 축출하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비상사태로 내치려다 실패하자 다시 비상식으로 비상사태를 만들고 있다. 행동의 비상을 법 비상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꼼수. 원인은 이들의 자만이다. 지금까지 해서 안 되었던 일이 없었다. 있는 죄는 없애고 없는 죄는 만들어내는 전지전능의 법 기술 앞에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젠 당헌 당규를 바꿔서라도 쫓아내려 하지만 오히려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들의 자만에 한몫하는 게 언론과 기자들이다. 먹을 것을 향해 짖어대는 하이에나 무리와 다르지 않은 이들은 또 다른 친일문학인이다. 정통 기자들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조선 이성계의 역성혁명 당위성을 위해 그의 가신과 신하들이 지어 올렸던 용비어천가와 세종이 석가를 찬양한 월인천강지곡의 현대판이 바로 작금의 언론 기사이다. 기록은 역사로 남는다. 친일문학의 달콤함이 평생의 명예를 망쳤듯, 권력 지향의 달콤함이 역사에 카피 되어 부끄러움의 표징으로 남는다. 교과서에서 필명을 떨쳤던 그들의 글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친일인명사전에 오명으로 각인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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