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쭉정이와 가라지라는 단어가 있다. 뜻은 같으며 알곡에 대비되는 말이다. 껍데기는 그럴듯하지만, 알맹이가 없으니 쓰임이 없음은 물론 키나 풍구로 날려 보내야 하는 후작업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쭉정이에는 쓸모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쭉정이가 머리 드는 법이고 어사는 가어사가 더 무섭다. 실속이 없는 사람이나 가짜인 사람이 자기가 제일이라고 들먹이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척도를 후에 가름지어질 알곡과 가라지로 말하기도 한다. 흔히 이러한 구분을 지식의 정도에서 찾으려 하지만 맞지 않는 말이다. 지식은 사람을 이루는 구성 원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성과 지식은 많은 연결점 중의 하나이며 영향력은 극히 적다. 그래서 선조들은 인간성을 됨됨이라는 기가 막힌 말로 표현했다. 배운데 없는 놈이라는 말은 학식과는 관계가 없으며 바로 됨됨이와 대치를 이룬다. 쉽게 설명하면 쭉정이는 지식이고 알곡은 됨됨이로 표현이 되는 알곡이다. , 쭉정이는 알곡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내부에 품은 내실은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가벼우며 풍구와 키로 날려 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지식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요즘 도래한 세상이 바로 쭉정이와 가라지의 세상이다. 시험이라는 단순 행위로 쟁취한 전리품에 취해 무소불위의 쾌도난마를 구사하고 있는, 겉은 그럴듯한 쭉정이들의 행진이 국정을 흔들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부류가 정치인뿐일까. 미안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현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올려서 계산하는 과대망상증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을 전문가들은 뇌의 착각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최소 중간은 간다는 착각으로 산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 이러한 착각이 없으면 자살률이 급격하게 상승할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나 역시 이러한 착각으로 살고 있으니 틀리지 않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이 밖으로 표출이 되면 인성이 결여된 지식처럼 알맹이는 사라지고 그럴듯한 쭉정이만 남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착각을 하며 산다. 특히 예술가들의 쭉정이질은 심각하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만용은 하이에나처럼 상대의 결점만 물어뜯고 할퀸다. 이러한 현상은 공부가 엷을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기술을 위해 겸손이라는 최대의 미덕을 포기한 예술인들의 특징이다. 어느 분야든지 실력의 고저는 있기 마련이지만 나름의 표현이 창작이요 예술이다. 타인의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현명함보다 상대를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는 어리석음이 인품을 망친다. 인품이 망가진 작가의 작품은 내실 없는 가라지에 불과하고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가는, 참을 수 없는 저질 인격으로 자리를 잡기 마련이다. 요즘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각종 전시 소식이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이면에 가라앉아 있는 탁한 기운에 마음이 개운하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강하게 불거지는 것이 바로 알곡과 쭉정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일도, 좋아서 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서 하는 것도 즐기는 것만은 못하다는 말이 있다. 순수한 아마추어 동아리들이 부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전문가라는 틀을 내려놓고 즐기는 마음이 바로 겸손이고 인덕이 된다. 어설픈 전문가의 오만은 훈훈한 아마추어의 즐김을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 전시의 계절에 느껴보는 소감이다. 내 작품에는 추호의 부정적 여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남의 작품엔 함부로 혀를 차는, 그럴듯한 쭉정이 지식인이 풍기는 불쾌감은 최악이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만의 이야기가 내재한다. 그곳에 자기 생각을 심으려 하는 행위는 지식을 가장한 무지이다. 작품은 마음으로 감상하는 게 옳다. 자신과 표현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렇게 그리는 것 아니다.”라고 하는 무지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로 쭉정이의 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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