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한여름의 작열하던 태양과 더운 열기는, 보다 풍요로운 가을을 선물해주기 위해 그리도 기승을 부렸나 보다.

그 살인적 불볕더위를 견디며 가을은 이렇게 익어가고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서 벌써 햇살 듬뿍 머금고 영글어가는 과일들이 탐스럽다.

무더위 속에서 극성스럽게도 괴롭혔던 온갖 병해충을 이겨내고, 탐스러운 볼륨의 우아하고 풍만한 곡선으로 성장한 대추와 사과 감들은 가지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서 노랗게 또는 빨갛게 익어가며 농염한 자태를 더해가고 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이 풍요롭다.

과수원이나 집에서 기르는 과실들은 농약을 치고 제초작업을 하는 등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자라왔다. 그러나 산과 들에 자생하는 초목들은 그 어떤 보살핌도 없이 오로지 강인한 생명력 하나로만 온갖 비바람 병해충을 이겨낸 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가을 햇살로 과육과 육즙을 채워가고 있다. 그렇게 익어가는 머루와 다래등 달콤한 맛을 찾아 날짐승 길짐승들은 또 저마다의 생존을 위해 우거진 수풀 사이를 뒤지기에 분주하다.

대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중추지절의 풍요다.

그러나 과유불급( 過猶不及)에서일까?

그 풍요를 시샘이라도 하듯 추석을 목전에 두고 불어닥친 역대 최고급 태풍인 "힌남도"가 온 산천을 휩쓸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 나무들의 생가지가 찢기고 뿌리가 뽑히고, 머지않아 성장의 절정에 다다를 과일들이 땅에 떨어져 수북이 쌓여있다.

마당 가에 심어서 가을을 기약했던 사과나무는 작년 가을부터 전지를 해주고,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름다운 꽃들을 아쉽지만, 적당히 솎아내서 튼실한 결과(結果)를 유도하고, 가지에 매달린 열매들을 숫자까지 세어가며 애지중지 키워왔건만, 아뿔싸! 간밤의 거센 비바람에 다 자란 열매들이 거의 다 떨어지고 절반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가지를 붙들고 살아남은 녀석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가!

"그래, 저 정도면 충분해, 매서운 툰드라의 계절풍이 불어오고 첫눈이 내리는 그날까지는 빨갛게 빨갛게 익어가는 그 탐스러움과 고운 빛을 즐길 수 있으리라."

"태풍 속에서도 살아남았기에 더욱 소중하고 풍성한 저 가을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이제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귀하고 값진 선물이 될 수 있겠지."

어디 그뿐이랴? 태풍은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농업용수나 식수원이 고갈되어 제한급수를 했던 우리 지역에 적당한 비를 몰고 와 내려주어서 물 걱정을 덜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자위하며 집 주변을 살피는데 화단에 만개(滿開)"과꽃"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다.

그 꽃들을 보며 되뇐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 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지 온 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누나가 없는 필자이지만 60대가 되어서도 이 노래를 부르면 없는 누나가 그리워지고 가슴이 메어온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정서다.

소년이 어렸을 때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누나와 셋이서 살아온 산골 또는 해변의 벽촌 마을, 가난한 살림 때문에 팔려가듯이 시집간 누님, 어쩌면 엄마와도 같았던 그 누나가 사무치게 그리운데 삼 년이 지나도록 소식조차 없다.

고향 집에 남겨둔 아버지와 어린 동생 걱정에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으련만 만만찮은 시집살이에 시달리며 삼 년 동안 친정 한 번 다녀갈 수 없는 누나의 마음이 얼마나 저리고 아팠을까?

소년도 그 새 철이 들어 그런 누나가 걱정되기에 더욱 보고 싶고 그리운 것이다.

오죽하면 꽃 속에서 누나 얼굴이 떠오를까?

그렇게 애타도록 누나가 그리운 과꽃이 피어나고 보름달이 떠오르고 자연의 풍요가 넘쳐나는 한가위의 계절, 모두가 고향 집의 그리운 부모·형제 친구들과 만나서 정을 나누며 단 며칠이라도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행복해할 수 있는 추석이다,

그러나 그런 명절이면 더욱 외롭고 그리움이 사무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올 혈육이 없는 사람들, 고향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 외국인 노동자들그런 사람들 모두가 조금이라도 덜 외롭게 주변의 따뜻한 배려가 이 가을의 풍요로 넘쳐나는 추석 명절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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