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당 이흥규의 고향 마을의 전설 기행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 단지(丹芝) 마을은 원래 마을 이름이 월성국(月聖國)이었다. 이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남방불교의 전래자(384-백제 침류왕 1)) 마라난타가 법성포에 도래해 내륙으로 전파해 오면서 이 마을 뒷산에 이르러 앞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바다가 호수처럼 보이고 그 지형이 마치 연꽃 모양을 닮았다. 그런데 그 연꽃 한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의 형상이 연꽃 위에 앉아계시는 부처님처럼 보여 월성국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40년경 이조판서를 추증받은 전주이씨 이 상연공이 대포리(竹洞)에 부친 이란 장군을 모신 후, 이 마을에 정착하며 지조 있는 선비의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붉을 단() 자와 지초 지() 자를 써서 단지동(丹芝洞)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옛날부터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감샘과 사모바위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을 웃뜸(윗동네)과 아랫뜸(아랫동네) 중간 큰길에 열 마지기 논배미가 있어 사람들이 지나다닌다고 하여 지남배미라고 부르는데 이 논과 경계를 이루는 밭 두둑 밑에 큰 연못()이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 마을의 상답으로 여긴다. 원래 이 고장은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겨울이면 무릎이 넘게 쌓이는 것이 예사였다.

어느 해 겨울 함박눈이 한없이 퍼붓던 날, 이 마을 뒷산 능선을 넘어가는 명지(明地)고개(마라난타가 염주를 굴리며 넘은 고개라고 하여 염주고개라고도 함) 너머 마을로 신부를 태우고 가던 가마가 지남배미를 지나며 허리까지 차오르게 쌓이는 눈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길이지 샘인지 분간 못하여 그만 가마와 가마꾼이 이 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위에 눈이 쌓이고 쌓여 가마가 빠진 줄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이듬해 봄에 날이 풀리자 가마와 가마꾼이 떠올라 마을 사람들이 와보니 신부와 가마꾼 모두 얼어 죽은 채로 흐트러짐 없이 원래의 모양 그대로 있더라는 것이다. 이 소문이 날개돋인 듯 퍼지자 신부는 무장고을 김진사네 막내딸이요, 신랑은 고개 너머 마을의 양씨 총각이었다고 한다. 양가에서 혼주들이 오고 마을에서는 이 가마를 명지고개 넘어 대덕산 골짜기에 묻어주어 그 골짜기 이름을 가매골(가마골) 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남배미 위로 닷 마지기 긴 밭이 나란히 있는데 밭 한가운데 사모관대의 사모(신랑이나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쓰는 관)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서 보면 가마 샘이 바로 코앞이다. 신랑이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보낸 신부를 못 잊어 날마다 이곳에 앉아서 가마 샘을 바라보고 그리워하며 울다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신랑이 신부 댁에 가서 혼례를 올리고 첫날밤을 보낸 뒤 신랑만 집으로 돌아오고 신부는 한해 또는 삼 년을 친정에서 묵힌 뒤(시가의 가풍과 부인이 갖추어야 할 온갖 행실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 신행하는 것이 양가의 예의범절이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사모(紗帽)바위 또는 사모(思慕)바위 (신부를 사모하는 바위)로 부르고 가마 샘은 () 자가 줄어든 감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감샘에서 밤에 여자들이 목욕하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남자 특히 총각이 목욕하면 빠져 죽는다고 하며 그 까닭은 새각시 물귀신이 총각을 신랑으로 여기고 끌어당겨 빠져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각들은 밤이면 이 샘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샘이 큰길 옆에 있지만 무더운 여름날 여자들은 이 샘가에서 마음 놓고 목욕을 한다.

이 감샘의 전설이 주는 교훈은 눈이 많이 오는 고장에서 한겨울에 날씨를 어기고 함부로 원행(遠行)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일러주고, 혼례를 치른 부부의 정을 그르치지 말고 일부종사하라는 가르침, 그리고 아녀자에 대해 함부로 흑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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