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4)-현장(玄奬)

중국의 소설서유기에 등장하는 원숭이 손오공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손오공은 신통력을 몸에 익힌 다음, 이곳저곳을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다가 석가여래에 의해 오행산의 바위에 갇히고 만다. 그러다가 무려 500년이 지난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현장에게 구출되어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렇다면, 과연 현장은 가공 인물일까, 실존 인물일까? 삼장법사(三藏法師)로도 널리 알려진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 현장(玄奬, 602?~664)은 실제로 이땅에 존재했으니, 이제부터 그를 만나러 가보기로 하자. 현장은 중국 허난성 뤄양 동쪽에 있는 거우스 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국학박사를 지냈고, 아버지 진혜(陳惠)는 수나라 때 강릉 현장을 지내다가 수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살았다.

현장은 도를 숭상하고 덕을 중시하는 집의 넷째 아들로서, 총명하고 예의 바른 아이로 자랐다. 유교 교육을 받긴 했지만, 그가 열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둘째 형 장첩법사를 따라 낙양의 정토사로 옮겨 가 불경 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 13세 때 승적(僧籍, 승려의 신분을 등록한 문서)을 얻어 화상(和尙, 승려가 되려는 사람 가까이 머물며 책을 읽히고 가르치는, 일종의 교사)이 되면서 현장(玄奬)’이란 법명을 받았다.

그러나 현장의 나이 17세 때 양제(煬帝)가 암살되고 말았으니,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수나라의 제2대 황제로서 만리장성을 짓기 시작하고 대운하를 파는가 하면, 고구려에 제2차로 침공하려다가 나라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물러가기도 하였다. 말년에 너무나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통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고, 이 와중에 전국에서 군웅(群雄)들이 일어나 왕위에 오른지 14년 만에 신하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 전체가 전쟁과 같은 난리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 와중에 현장은 형과 함께 장안(長安, 당나라의 수도. 현재의 서안)으로 몸을 피하였다. 스무 살 때는 혼자 몸으로 중국 안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23세 때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대각사에 머물렀다.

그런데 현장의 경우, 불교 경전을 공부하면 할수록 교리에 대한 의혹과 역경(譯經-번역된 불교 경전)에 대한 의문이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627(일설에는 629) ‘불교 발상지인 천축 나라(天竺, 인도)에 가서 불교 경전 원본을 구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도중 고창(高昌國)의 왕 국문태의 대접을 받기도 했던 바, 이 나라는 지리상으로 동서(東西)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던 관계로, 중국과 서방의 문화적 요소가 뒤섞여졌으며, 특히 불교가 많이 발전해 있었다.

인도에 도착한 현장은 나란다라는 절에 들어가 계현법사(인도의 유명한 불교학자) 아래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그리고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645년 정월 조정과 재야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면서 땅을 넓혀나가던 태종(이세민.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 현장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평가하여 나랏일을 도우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현장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는 데만 힘을 쏟다가 62세 무렵 눈을 감았다. 그가 번역한 불경의 수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잘 설명한대반야바라밀다경을 비롯하여 무려 1,335권에 이른다. 이 외에도 인도 및 중앙아시아에 대한 견문록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을 남겼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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