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호/ 시인, 행정학박사, 백두산문인협회 회장

지난 930() 고향을 방문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광주광역시와 전남 출신 향우들의 모임인 재경(在京)광주전남향우회가 주최한 행사이다.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살고 있는 재경광주전남향우회 회원은 정확한 통계 숫자는 아니지만, 대략 5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재경광주전남향우회는 19553, 재경전남향우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어 김동현 대법관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당시에는 광주광역시가 생기기 전으로 목포시처럼 광주시였다. 19964월 재경전남향우회를 재경전남광주향우회로 개칭하고, 19983월 재경전남광주향우회를 재경광주전남향우회로 개칭하여 현재 36대 최재규 회장에 이르고 있다.

6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광주광역시와 전남 22개 시·(市郡) 향우회가 조직되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사, 상임이사, 부회장으로 참여하다가 1992년 정래혁(丁來赫) 전 국회의장이 22대 회장, 1994년 유양수 전 교통부장관이 23대 회장으로 있을 때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정래혁 회장은 임원 모임에서 나를 보면 시인이라고 부르며 시 많이 쓰고 있느냐고 다정한 말을 걸어오곤 했다. 유양수(柳陽洙) 회장은 1995324,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있었던 나의 첫 시집 화산(火山)출판기념회 때 축하 화환을 보내주셨는데, 그 화환이 가족 기념 사진에 찍혀 있어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19964월 취임한 제24대 회장 장지량(張志良) 전 공군참모총장과는 많은 교류가 있었다. 1997429, 이전까지 전남향우라는 이름으로 조그맣게 나오던 회지를 바뀐 명칭인 재경전남광주향우회의 홍보부회장 겸 편집위원장을 맡아서 전남광주향우로 확대 혁신판을 발행했다. 처음으로 부산 까지 찾아가서 재부산호남향우회 김정식(金正植) 회장을 인터뷰하고, 재경전북도민회 송삼석(宋三錫) 회장(모나미그룹 창업자)을 만나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당시 250만 도민을 위하여 봉사하는 허경만(許京萬) 전남도지사(전 국회부의장), 강운태(姜雲太) 내무부장관, 정시채(丁時采) 농림부장관도 사무실로 찾아가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약력과 주소까지 한자(漢字) 투성이인 회원 주소록(273p466p)을 중국 동포(조선족) 알바생을 채용해서 전부 한글로 바꾸었다.

향우회가 주최하는 이번 고향방문은 특색이 많았다. 각 시군 별로 향우들이 한 두 대씩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전남 장성군 장성호(長城湖) 체육공원 야외 축구장에 집결했다가 자기 출신 시군으로 가서 12일 일정을 보냈다. 이곳에 3,022명이 모였다고 한다. 향우회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기네스북에 올려야 할 신기록이다. 김영록 전남도지사와 장성·담양·함평·영광 지역 출신 이개호(李介昊) 국회의원, 박원종·오미화 전남도의원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나는 상임자문위원으로 본부팀으로 아침 630, 향우회 사무실 앞에서 최봉인 상임고문, 최대규 회장 등 임원들과 함께 하루 일정으로 출발했다. 본부팀은 장성 행사에 참석한 후, 나의 고향인 영광 불갑사로 가서 꽃무릇이러고 부르는 상사화(相思花)를 보기 위하여 출발했다. 서로 사랑하지만 푸른 잎이 핏빛 붉은 꽃을 보지 못하고 지고 나서야 잎이 피어난다는 상사화는 지고 꽃대만 우리를 반겨주었다. 상사화 꽃과 잎이 서로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잎처럼 꽃을 보지 못했다.

백두산역사문화탐방을 20회 주최하면서 찾아간 백두산은 높은 산(해발 2,750m 장군봉, 2,744m 병사봉)으로 항상 구름 속에 있기 때문에 천지(天池)를 못 보고 돌아오는 일이 많이 있다. 허탈해 하는 일행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백두산 산신령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한 번 더 찾아오라고 천지를 안 보여 주신 것 같다. 다음에 다시 오자고 말한다. 불갑사 상사화도 우리를 사랑하는지 한 번 더 찾아오라고 꽃을 안 보여준 것 같다고 위로했다. 영광읍에 있는 문정 한정식에서 저녁을 먹고 나는 고향집으로 가기 위해서 남고, 일행은 서울로 떠났다.

고향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누구나 그리운 곳이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더 난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 생각이 더 난다. 철없이 뛰놀던 어린 시절이 그립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저지른 불효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지금은 자주 고향에 가지만, 몸도, 정신도 더 삭아지면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 죽으면 부모님 곁에 묻힐 예정이다. 꿈 속에서 꿈을 꾸고, 길 위에서 길을 찾으며 허겁지겁 달려가는 우리네 삶은 아름답고도 슬픈 무지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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