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다시 가을이다. 바람이 낙엽을 타고 스산해지면 느는 게 식욕과 독서욕이다. 확실한 이유는 모르지만 매년의 느낌이다. 천고마비가 아니라 천고인비의 계절이다. 독서는 정신을 살찌우니 몸과 마음을 함께 추스르는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날로그 세대에게 지식의 물을 주었던 종이책은 급속히 줄어들고 전자책 혹은 영상 강의 등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세상의 소식을 각종 SNS와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접하고 듣는다. 특히 그렇게도 목을 매었던 외국어 공부는 각종 번역기에 밀리며 중요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세계 각국의 뉴스와 소식은 바로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뜨고 짧은 외국어 실력이 많이 불편하지만은 않다. 다만 빛의 속도로 변하는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지가 문제이고, 한편으론 능력이 되었다. 한 손으로 들지 못할 정도의 큰 사전과 자전은 작은 스마트 폰 안으로 들어갔고, 대용량의 문서와 사진 파일 등 역시 손안의 스마트 폰으로 세계 어디든 실시간으로 보내진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이러한 현실이 우주인 기술이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시대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세대지만, 머리는 발전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자꾸만 괴리감을 느껴가는 중이다. 회갑을 넘긴 사람에게 꿈의 기술들은 결코 편리한 공익의 꿈이 아니고 나이를 절감케 하는 절망의 악몽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감당이 어려운 정보의 홍수는 손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이를 판단하고 갈무리할 능력은 없으니 해석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독선적이다. 이를 젊은 세대는 아집이라 말하고 꼰대라고 적는다. ‘독선과 아만(我慢)’이다. 원인은 판단력의 부재에서 오지만 정작 자신은 느끼지 못하며 항상 자기가 옳다. 사유의 능력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평면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평생 삼차원의 입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나아가는 곳은 나뭇가지든 시멘트벽이든 불문하고 평면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판단력을 제거당하면 각자가 소유한 지식이 순식간에 고착화 된 평면으로 변한다. 판단력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은 우월감이다. 우월감은 판단력을 기조로 삼지 않는다. 자신이 곧 판단의 기조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는 기본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신이 본 것만 맞는다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산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무리 뉴스와 정보 그리고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져도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받아들일 방법이 없다. 그리고 머릿속은 무지의 공황으로 남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부류의 인물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다시 절실해지는 게 종이책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현실에서, 가장 확실하게 검증된 지식이 책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최근 유튜브에서 차고 넘치는 개인 미디어의 내용이 검증을 거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진위를 판단해 내는 방법은 확고한 자신의 지식이 될 수밖에 없다. 저자와 출판사를 보고 판단하는 책의 가치와 신뢰성은 너무 분명해서 독자를 속일 방법이 없다. 공신력 있는 외신과 미디어를 배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요즘 국내 사정을 오히려 외신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고, 외신의 신뢰성은 대단하다. 기자의 품격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격이란 직업에 관한 윤리적 사명감이다. 이것 역시 다독에 의한 상황의 판단과 정립된 삶의 방향이다. 책은 인성을 만들고 일관성 있는 철학을 형성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동양고전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노자의 도덕경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노자의 다면 중에서 한 면만을 본 것이다. 코끼리의 다리만 만져보고 판단을 한 것처럼 위험한 경험이 된다. 많은 철학자의 저서를 독파하지 않으면 전체 모습을 형상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눈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자신만의 잣대로 들이대는 판단은 위험하다. 특히 국가를 끌어가는 지도층의 아집과 우월감은 때론 국가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종이책을 읽자. 다독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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