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5)-황희 정승

이번 호부터는 매우 가난한 집안 출신의 철학자들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에 앞서 너무나 유명한 황희 정승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드리고자 한다. 황희(黃喜)는 자헌대부(2품 하위계급) 판강릉대도호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말인 13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후 몇몇 판서를 지내던 중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령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데 적극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로 예조판서, 강원도 관찰사, 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그러나 죄없는 사람을 때려 죽인 자신의 사위 서달을 벌도 주지 않고 풀어주었다가 다시 파면되고 말았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한달 만에 다시 그를 벼슬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이번에는 1천여 마리의 말을 죽게 한 제주 감목관 태석균의 감형을 개인적으로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말미암아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하지만 또 이듬해 복직되어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일 끝에 1449(세종 31)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18년 동안 국정을 관리하였다. 물론 그의 업적도 눈이 부셨거니와 무엇보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이 너무 가난하다는 말을 들은 세종대왕이 하루 동안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상품은 모두 황희의 집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필 이 날은 종일 비가 내리는 통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녁 때 달걀 한 꾸러미가 들어왔는데, 달걀을 삶아놓고 보니 모두 곯아서 먹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계란유골(鷄卵有骨)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하거니와 이러한 일화들를 통하여 우리는 그를 청렴결백한 재상, 청백리의 표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겨울날. 대궐에서 돌아온 영의정 황희가 부인에게 겨울철 단벌옷을 뜯어 빨아주라 부탁했다. 밤새 말리고 꿰매면, 내일 아침 입궐할 때 입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다음 속옷 차림으로 책을 뒤적이고 있을 때, 갑자기 입궐하라는 소식이 당도했다. 당황한 부인에게 그는 이미 뜯어낸 솜이라도 내어달라 했다. 어명이니 대궐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벌거벗은 채 관복만 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황희는 부인이 바지 솜과 저고리 솜을 얼기설기 꿰매주자, 그 위에 관복을 걸쳐 입고 서둘러 입궐했다.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느라 정신이 없던 세종대왕의 눈에 황희의 관복 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 것이 보였다.

세종은 양털인 줄 알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것 참 이상하다.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소문난 황정승이 양털로 옷을 해 입다니......’ 회의가 끝나고, 세종은 황희를 가까이 오라 일렀다. “경의 청렴결백은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되며 하늘에게까지 상달된 것으로 아는데, 어찌 오늘은 양털 옷을 입으시었소?” 임금의 추궁(?)에 당황한 황희는 그것은 양털이 아니라 솜이며, 겨울옷이 단벌이라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세종은 황희에게 비단 열 필을 내리라 명령했다. 그러나 황희는 이 나라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자가 많은데, 어찌 영상의 몸에 비단을 걸치리까? 솜옷 한 벌로도 과분하옵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세종은 용포(龍袍, 임금의 시무복)를 걸치고 있음이 부끄럽다 하며, 비단 내리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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