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6)-서경덕

옛날이나 지금이나 철학자를 포함한 학자들은 대체로 가난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게 중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한 사람도 있었다. 유학자 서경덕(1489-1546)의 아버지 호번은 비록 벼슬을 했다고는 하나, 남의 땅을 소작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것으로 보아 봉급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호번은 비록 소작인이었으나 소작료를 속이지 않고 꼬박꼬박 내어서, 땅주인은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고 받았다고 한다.

호번은 개성에 사는 한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한 번은 개성에 큰 불이 나서 그의 집에까지 옮겨 붙고 말았다. 이때 그가 향을 사르고 축문(祝文)을 지어 평생에 감히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나이다.” 하고 하늘에 고하자, 갑자기 바람이 일어 불이 붙은 초가지붕을 걷어버렸다. 이에 사람들은 이 집이 여러 대에 걸쳐 덕을 쌓았기 때문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입을 모았다.

서경덕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열네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학의 경전들을 배우게 되었다. 또 정해진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학자가 된 사람이다. 그의 경우 잘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벽이나 천장에 써 붙여놓고 하나씩 궁리해나갔다. 예컨대, 하늘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하늘 천()’ 자를 벽에 붙여놓고 문을 잠근 채 한없이 그 글자를 바라보며 이치를 생각하였고, 또 땅의 이치를 알고 싶으면 땅 지()’ 자를 붙여놓고 계속 궁리해나가는 그런 식이었다.

서경덕은 스물다섯 살에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조광조는 과거시험을 통과한 120명의 인재들 가운데 서경덕을 제 1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쌀이 떨어져 며칠씩 굶고 지내는 판인데도, 조정의 봉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서경덕은토정비결의 저자이자 제자인 이지함을 데리고 대곡 성운(成運)과 남명 조식(曺植)이 은거하고 있던 지리산 언저리를 찾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한 덕택에 성균관에 들어가긴 했으나, 얼마 견디지 못한 채 뛰쳐나오고 말았다.

개성으로 돌아온 그는 송악산 자락에 있는 화담(花潭)에 자리를 잡고, 그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부인은 마을에 살면서 초막에 가 밥을 지어주었고, 그리해서 이때부터 화담 선생이라는 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개성 근처는 물론이요, 서울에서까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어느 날 제자인 강문우가 쌀을 짊어지고 가보니, 스승이 한낮이 되도록 사람들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부엌에 들어가 물으니, 부인은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했습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역시 제자인 허엽이 그를 찾아가는데, 장마가 계속되다 보니 화담으로 건너가는 냇물이 불어나 있었다. 엿새 동안 기다린 끝에 마침 냇물이 조금 준 것을 보고 건너가니, 화담은 태평하게 거문고를 타며 글을 읊고 있었다. 허엽이 저녁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화담은 나도 저녁을 먹지 않았으니 내 밥도 지어라.”고 말했다. 허엽이 솥뚜껑을 열어보니, 솥 속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개성 출신의 기생 황진이가 화담을 여러 번 유혹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거니와, 이후 개성 사람들은 황진이와 박연폭포, 서경덕을 묶어 송도삼절(松都三絶, 개성의 빼어난 세 가지)이라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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