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17)-피히테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 철학자 피히테(1762-1814)는 람메나우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가난한 제조공의 여덟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덕적으로 엄격했던 그의 아버지는 성실한 성품으로 인하여 평생 아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넉넉지 못하여 피히테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가축 지키는 일을 먼저 하도록 해야만 했다.

이때 그 지역의 유지인 밀티츠 남작이 피히테의 자질을 알아보고 도움을 준다. 이 덕분에 피히테는 시립학교를 거쳐 당시 유명했던 포르타의 귀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이곳에서 열여덟 살 가을까지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으나, 예나 대학에 다닐 때쯤 해서는 다시 경제가 어려워지고 말았다. 자신의 오랜 후원자였던 남작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가정교사 생활을 통해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과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 자살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스물 여섯 살 때 스위스로 가게 된 피히테는 취리히에서 한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서 스물 여덟 살 때까지 머무는데, 이 무렵 그는 란(Rahn)이라는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려운 재정 여건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3년 후로 미루어진다. 그러던 중 학부모에 대한 피히테 자신의 오만불손한 태도로 인하여 그 가정교사 자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독일의 라이프치히로 갔다. 돈을 버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한 끝에 여성교양 잡지를 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출판업자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비극과 단편소설을 써보기도 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스물 아홉 살 때 피히테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우로 간다.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일에 실패한 피히테는 다시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가 칸트를 방문하게 된다.

칸트로부터 학자금을 받아보리라는 기대감으로 피히테는 한 달만에 완성한 논문,모든 계시에 관한 비판의 시도를 칸트에게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학자금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대신 칸트의 중재로 단치히의 가정교사 자리와 자신의 첫 작품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소개받게 된다. 칸트 철학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한 편지에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학부모와 갈등을 일으킨 그는 다시 궁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칸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갔다. 말대꾸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그는 당돌하게도 돈을 빌리려고까지 한다. 이 일이 성공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서른 살 때인 1792년 쾨니히스베르크의 출판사는 피히테가 쓴 논문의 저자 이름을 숨긴 채 출판을 감행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랫동안 칸트의 종교철학에 관한 저술을 기다려왔던 독자들은 이 책이 칸트가 익명으로 출판한 책일 것이라고 여겨 큰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후 칸트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고 이 저서의 원 저자(피히테)의 이름을 밝히자 피히테는 갑자기 유명해지고 만다.

서른 한 살 때인 1793년 다시 취리히로 돌아온 피히테는 그 유명한 페스탈로치(스위스의 교육자)와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교육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해 1022, 피히테는 드디어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란과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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