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20)-한유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지금까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부터는 지독하게 가난한 경우이다. 당나라 때의 문장가이자 유학자인 한유(韓愈, 768~824)는 남하양(南河陽 =현 하남성 맹현) 사람으로 아버지 중경과 작은 아버지 운경은 모두 글을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하지만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형을 따라 영남(嶺南-남영산맥 즉 난링산맥의 남쪽 지방. 현재의 광둥성·광시 좡족 자치구·하이난성의 전역·후난성·강서성의 일부)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형마저 죽고 나자 어머니, 조카와 함께 다시 강남(江南-양쯔 강 이남의 지역. 현재의 장쑤성·안후이성·저장성 등)으로 집을 옮겼다. 한유는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위로 세 분의 형님들이 계셨으나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상의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은 아들 항렬에서는 나 하나이고, 손자 대열에서는 너 하나뿐이로구나. 두 대에 각각 한 사람씩만 남았으니, 너와 나의 신세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하구나!”

그러나 이 조카마저 곧 죽고 말았으니.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한유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을 잃지 않았다. 고독하고 곤궁한 생활 가운데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유명한 스승이 지도해주거나 좋은 친구들이 다듬어주지는 않았으나, 스스로 자습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 유가·도가·묵가·법가·명가 등을 통틀어 이름)를 완전히 읽어냈다. 그는 일찍부터 “3대 양한의 책이 아니면 감히 보지 않으며, 성인의 뜻이 아니면 감히 품지 않는다.(非三代兩漢之書不敢觀, 非聖人之志不敢存.)”라는 포부를 지니고 살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삼대(三代)란 하((()나라를, 양한(兩漢)이란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마침내 25세에 진사가 된 후 29세부터 벼슬길에 들어섰는데, 사문박사(四門博士-당나라 때 서민을 위하여 사방에 세운 대학의 교수), 감찰어사(모든 벼슬아치들을 감찰하고 나라의 제사, 조정의 조회, 재정의 출납 등을 감찰함)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815년에 지은논불골표(論佛骨表)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는 그가 형부시랑(오늘날 법무부의 부이사관 정도)으로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헌종(당나라 제 11대 황제)은 신하 30명에게 명령하여 섬서성의 봉상(鳳翔) 법문사에 있는 석가문불(釋迦文佛=석가모니불. 부처 즉 신으로 모시는 석가모니)의 손가락 뼈 한 조각을 맞이하여 궁 안으로 들여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3일 동안 제사를 지낸 다음, 다시 절로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황제가 이러한 형편이니, 벼슬아치들과 일반 백성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서로 뒤질세라 앞을 다투어 그 뼈 마디에 제사 지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 일로 말미암아 수도인 장안 전체가 떠들썩하였다.

이에 한유는 크게 통탄하여 헌종에게 부처의 뼈를 논하는 한 편의 글을 올렸다. 그 가운데에는 동한(東漢-왕망에게 빼앗긴 왕조를 유수가 다시 찾아 부흥시킨 나라. 그러나 220년에 위나라의 조비에게 또다시 멸망당함)의 군주들이 불교를 열심히 믿은 다음부터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헌종이 이 글을 보고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이에 모든 신하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후 여러 사람들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청하자 헌종은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그를 조주(潮州-광동성 차오저우)의 칙사(勅使-임금의 어명을 받은 사신)로 보내었다. 그때 한유의 나이 50세였다. 그러나 반란군을 진압한 공로도 있고 하여, 목종(당나라 제12대 황제)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돌아와 이부시랑(오늘날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었다. (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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