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22)-최제우

최제우(1824~1864,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는 경북 경주군 견곡면 가정리(지금의 경주시)에서 7대째 벼슬을 하지 못한 몰락한 양반 가정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인 최진립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함으로써 병조판서로 추서되었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지 못해 쇠락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 역시 영남 지방에서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문사(文士)였지만, 과거시험에 떨어져 벼슬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는 두 번이나 아내와 사별(死別)한 아버지가 환갑이 지난 나이에 단봇짐장수 여인을 만나 낳은 아들로,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열심히 공부를 하였지만, 양반·상놈의 구별이 심한 데다 정실 부인의 몸에서 태어났느냐 첩의 몸에서 태어났느냐를 따지는 시대인지라 과거 시험을 볼 수조차 없었다. 더욱이 부친은 열일곱 살의 최제우를 남겨둔 채 숨을 거두고 만 데다, 이미 열세 살의 나이에 결혼을 한 최제우에게는 돌보아야 할 가족이 딸려 있었다.

점점 가난에 빠져들게 된 최제우는 스물한 살 때, 집과 고향을 등지고 나와 세상을 떠돌기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중에 무당, 점쟁이, 장사, 서당 훈장 등을 해보았으나 신통치 않았다. 마침내 세상 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그동안 천명(天命)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 해석한 최제우는 그 천명을 알아낼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856년 여름, 경남 양산의 통도사 뒤 천성산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천성산의 중턱에 있는 자연동굴 적멸굴에서의 49일 정성 기도,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 닦기로 이어졌다. 185910,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에도 구미산(경주시 교외에 자리한 산) 용담정에서 수련을 이어나갔다.

이 무렵 재산은 모두 없어지고 빚만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였다. 나라 안의 분위기 또한 문란한 정치와 천재지변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국제 상황 역시 2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하여 톈진조약을 맺는 등 민심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바로 이 무렵인 186045, 최제우는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하게 된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던 것. 그것은 바로 상제(上帝=하느님)의 음성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었고, 이후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하나하나 깨달아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천주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여긴 그는 자신의 이름(이때까지의 이름은 복술·제선)을 제우(濟愚)라고 바꾸면서까지 구도(求道)의 굳은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어느 날 빚 독촉을 하던 노파가 행패를 부리자, 최제우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밀쳐버렸다. 그러자 노파가 기절하더니 이내 죽고 말았다. 노파의 아들과 사위가 몰려와 노파를 살려내라고 하자, 그는 닭털 꼬리를 노파의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노파는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하며 살아났다. 이 일로 인하여 그가 신통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최제우는 동학 창도에 나섰다. 동학(東學)이란 경천(敬天) 사상과 민족의 전통사상을 융합한 종교이다.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 부르는 데 대하여, 우리의 도를 천명한 것이라는 뜻에서 동학이라 불렀다. 1861년 그가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