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24)-홉스

이번 호에도 지독히 가난했던 집안 출신의 철학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1588~1679)는 영국 서남부 윌트셔 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 그 지방에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침공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막강한 전력을 가진 무적함대는 1588528일 네덜란드 육군과 합류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이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함 80, 병력 8,000으로 맞서게 하여 무적함대를 보기좋게 물리쳤다. 그러나 무적함대의 침공 소식으로 모든 주민들이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홉스의 어머니도 놀란 나머지 임신 7개월 만에 홉스를 낳고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현재 이때의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홉스 자신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어머니가 엄청난 긴장 상태에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어머니는 쌍둥이로 나를 낳으셨는데, 그 한 명이 나이고 다른 한 명은 공포이다.” 이처럼 홉스는 숙명적으로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예고 받았던 셈이다.
홉스의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이름없는 목사였다. 그리 모범적이지도 않은 데다 이상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토요일 밤늦게까지 트럼프 놀이를 하고 다음날 설교단 위에서 졸다가 엉뚱한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예배 보던 신자들을 놀라게 한 일까지 있었다. 그가 예배 중 잠이 들어, “클럽(카드의 네 가지 무늬 가운데 하나. 검은색의 클로버 잎 모양)이 으뜸 패요.”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홉스 아버지는 교회당 앞에서 다른 목사와 난투극을 벌인 나머지, 그의 부인과 21녀의 자식을 버려 둔 채 쫓겨나야만 했다. 그 후로 평생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런던에서 다시 그를 보았다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홉스 자신이 그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홉스는 장갑 장사로 돈을 많이 번 삼촌 덕분에 4살 때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한 교사로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다. 특히 그 교사는 누구보다 총명한 홉스를 매우 사랑하였다. 하지만 홉스는 대학에 진학한 뒤로부터 공부를 게을리했다. 대신 들판에 나가 갈까마귀(몸길이 약 33cm의 검은색 까마귀. 곡식에 해를 끼침)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들여 지도 가게에서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이나 지도상 알 수 없는 땅이라고 쓰인 지역에 대해 상상하기를 즐겨 했다. 그래서 수십 년 후, 그의 친구인 시인 카울리가 그를 과학의 콜럼버스라고 부른 것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홉스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학교장의 소개로 매우 부유한 윌리엄 카벤디쉬의 아들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이렇게 시작된 홉스와 그 가문과의 인연은 몇 년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홉스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인연은 개인적인 생계 수단의 차원을 넘어 그에게 17세기 정치와 과학, 철학이 서로 만나는 장소에 들어설 수 있는 행운을 제공하였다.
1610년 홉스가 20대 초반일 때, 그의 제자 윌리엄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떠난 것이다. 당시 영국 신사 교육에 있어서 유럽 대륙 순방은 필수 코스이기도 했다. 그 후 1618년과 1622년 사이에 홉스는 프란시스 베이컨(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과학자. 대법관)의 비서로서 일한 적이 있다. 베이컨은 홉스야말로 나의 철학을 이해하는 몇몇 사람 중에 하나라고 말했다. 베이컨은 과격한 경험주의자였고, 홉스는 철저한 합리주의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거꾸로 읽는 철학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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