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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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과 김삿갓

우리에게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으로 더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방랑시인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되던 해, 평안도를 중심으로 민란인 홍경래의 난’(1811, 순조 11)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안동김씨들의 극렬한 세도정치로 인해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벼슬을 사고파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특히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이라 하여 전정·군정·환곡 등의 세금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힘없는 백성들은 죽어라 농사를 지어도 세금을 받치고 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이때, 핍박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한 무리의 백성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들고 일어난 사건이 홍경래의 난이었다.

농민뿐 아니라 세도정치로 피해를 본 양반과 상인들까지 가세한 민란은 빠른 속도로 퍼져가며 순식간에 주변 여덟 고을을 점령하였다.

홍경래는 여러 지역의 관아를 점령하고선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던지 지방관아의 고을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 역시 홍경래에게 항복을 했는데 난이 평정된 후 연좌제에 의해 패가망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김병연은 다행히 하인의 도움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했는데 안동김씨였던 그의 집안은 후에 사면을 받는다.

집안의 과거사를 모르고 살았던 김병연이 자라서 성인이 된 후 과거시험에 응시를 했다.

그런데 운명이었을까, 과거시험의 시제가 하필 홍경래의 난에 관한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 지방관아의 수령으로써 반란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은 정가산과,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포기하고 항복해 버린 김익순을 비교 평가하라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조부 김익순의 일을 전해 듣지 못했던 그는 정가산을 빛나는 충신으로 조부 김익순은 백 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비겁자로 능욕하는 글을 써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다.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들은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모든 걸 버리고 그때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이 그렇게 경멸하던 죄인의 손자인 것도 부끄러웠지만 무엇보다 할아버지를 능욕하는 글로 급제를 했다는 것이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전두환씨와 이재명씨

얼마 전, 이재명 민주당대표의 선거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전 성남도개공 간부 유모씨가 자신이 모시던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을 이재명씨라고 호칭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또 있다. 할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며 518 성지 광주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손자 전모씨는 할아버지를 전두환씨로 부르며 학살자로 표현을 해서 우리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물론 유모씨나 전모씨의 주장처럼 이재명대표의 죄가 없다거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의 학살자가 아니어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지근거리에서 수십년을 모셔왔던 상사를 직함대신 로 부른다거나 연유를 알 수는 없지만 친손자가 할아버지를 로 부르며 학살자라고 능욕하는 것을 가족중심의 오랜 전통이 자리잡았던 우리의 정서상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까.

조부를 비판한 글로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김병연이 자신은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벼슬을 버리고 평생 삿갓을 쓰고 다녔던 것은 조부가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비겁자여서가 아니라 그 전에 핏줄인 가족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존칭어가 잘 발달하지 못한 중국어나 서양말에서는 윗사람을 부를 때도 존칭없이 이름을 불러 마치 반말을 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가 잘못된 표현은 아니지만 세계 어느나라 말보다도 격에 따른 존칭어가 발달되어 있으며 오랜 세월 그 언어에 젖어 살았던 우리에게는 그런 표현이 결코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시던 상사를 로 격하하여 부른다거나 친손자가 할아버지를 학살자로 지칭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동물적인 개인주의의 도래를 우려하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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