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고집(3)-자기가 만든 법에 따라 죽은 사람-상앙

춘추·전국 시대에 일어난 법가(法家) 가운데 상앙(商鞅, ? -기원전 338)은 준법정신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 무렵 진()나라에서는 젊은 왕 효공(孝公)이 막 즉위하여 야심만만하게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효공은 위나라 출신인 상앙을 좌서장(左庶長-고위급 관직)으로 임명하여 정치개혁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이때 상앙이 만든 법의 내용은 엄벌주의와 연좌제(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묻는다거나, 또는 그 역순), 밀고(密告)의 장려, 신상필벌(信賞必罰-상과 벌을 분명히 하는 일) 등 법률 최고주의였다.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법률의 구속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상앙은 나라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30(9m)의 장대를 수도인 함양의 남문에 걸어두고,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열 덩어리를 상으로 주겠노라!”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수상하게 여기어 아무도 옮기는 자가 없었다. 이에 상앙은 상금을 황금 50덩어리로 올렸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어 장대를 북문으로 옮겼고, 상앙은 즉석에서 황금 50덩어리를 상으로 주었다.

한 번은 태자가 사형을 받아야 할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할 태자인지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다. 이에 태자의 시종장인 공자 건()의 코를 깎고, 교육을 맡고 있는 공손가는 문신(文身)의 형으로 다스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은 모두 법을 준수하여 아무도 감히 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였다. 그저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이에 진나라는 질서가 잡혀갔지만, 그에 비례하여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늘어만 갔다.

이 무렵 조량이라는 사람이 상앙을 찾아와, “백성들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면 원망이 쌓이고, 언젠가는 재앙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고향으로 내려가 사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상앙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 이가 바로 혜왕이다. 태자 시절 자신의 잘못을 꾸짖어 스승의 코를 베어버린 상앙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는 혜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상앙이 사직하고 상읍(商邑-공손앙이 하사 받은 봉읍)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행렬은 제후에 못지않았다. 그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혜왕은 아예 상앙을 제거하기로 맘 먹고, 군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상앙은 급히 도망가다가 국경 근처의 여관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가 상앙임을 알지 못한 채, “상앙의 법률에 여행권이 없는 자를 잠 자게 하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라면서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상앙은 속으로 , 내가 만든 법률의 폐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구나!’라며 탄식하였다. 결국 혜왕의 군대에 의해 체포된 상앙은 차열(車裂), 두 대의 우마차에 나누어 묶어놓고 각각 반대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로 처형하였다. 그리고는 그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돌려 보였다. 또 상앙의 일가친척은 구족(九族)까지 몰살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앙에 대하여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고 희롱하였다. 만약 상앙이 몇 달 전 조량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만 했더라면 그토록 처참한 죽음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앙은 비록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가 정비한 법과 제도는 뒷날 진시황제로 하여금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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