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과거 우리 역사에서 사대주의는 내려놓을 수 없는 과제였다. 선택이었지만 선택이 될 수 없는, 국가적 사명으로 자리를 잡았던 아픔의 기억이다. 거대하고 극강했던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를 거치며 누렸던 황제의 나라라는 위용은 몽골의 원에 의해 깨지고 부마국으로 전락하면서 민족 자존감은 무참히 무너졌다. 세계사에 기록으로 남은 원의 국경 확장은 고려에서 막혔고, 고려는 무려 30년을 대몽 항쟁이라는 긴 악몽을 견디며 싸웠다. 대몽 항쟁의 주역 무신정권 삼별초는 진도를 거쳐 탐라에서 행적을 감췄지만, 무적 몽골에게 가장 긴 전쟁의 추억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고려 왕실은 원의 부마국으로 만족하며 몽골의 복장과 몽골의 관제를 따랐다. 왕실과 조정의 고관 자제들은 몽골의 습속을 따르는 게 당연했고 일종의 엘리트 의식마저 가졌다. 이렇게 백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며 새로운 정치를 위해 세워진 것이 조선이다. 중심에는 정도전이 있었고, 조선은 그의 치국 철학이었다. 하지만 그가 세운 법은 중국 삼대 상국인 주나라의 법제를 따랐고 치국의 사상 역시 주나라를 표본으로 삼았다. 주나라는 조선 선비들의 이상국이었다. 조선 여성을 대표하는 사임당 신인선(申仁善/본명이라고 전해지지만 정확하지는 않음)은 사임당(師任堂)이라는 당호를 주나라 태임이라는 여성을 존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겠다는 의미에서 스승 사()자를 태임(太任)의 임자에 붙여 사용했다. 태임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이다. 이렇게 이어진 사대주의는 조선 중기를 거치며 극대화되었다. 가장 큰 폐해를 끼친 학문은 주자학이다.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주자학을 거스르면 바로 사문난적이 되어 유림에서 파문되었다. 개신교의 목사, 가톨릭의 신부, 불교의 스님이 파문당하는 것과 같은 의미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보는 유림의 파문은 훨씬 심각하다. 집안의 멸문부터 작게는 유배까지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으로 풀이되는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을 살핀다는 학문이다. 물론 본성을 성찰하고 조금 더 나은 인간성을 회복 혹은 공부하며 사회에 순행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선 나무랄 수 없지만, 조선이라는 국가를 통째로 유교의 허상에 담가버린 세태라는 점에서는 심각하다. 이렇게 고조선의 홍익사상은 중화사상의 가랑이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 버렸다. 명나라에 반하는 혹은 고조선과 후계국들을 다룬 기록은 모두 찾아서 폐기했고 감춰둔 사람은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명과 청의 교체기에 실리보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결국 명분 때문에 청의 가랑이 사이로 다시 엎드려야 했다. 성리학의 성리(性理)라는 명분은 이미 청에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위해 궁궐 후원에서 제까지 올렸다. 만주족이 주를 이루는 청은 명의 입장에서 같이 바라보았으니 오랑캐 이상은 아니었다. 중화가 아닌 민족은 모두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 역시 오랑캐 이()를 붙여 동이족이다. 스스로 우리가 우리를 일컬어 동쪽 오랑캐라 칭하고 있으니 경이롭다. 동이는 구이(九夷)의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구이는 우리 민족의 본류라는 것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이 자랑하는 그들의 역사서는 모든 것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중국의 태시조인 삼황오제는 동이족이었으며 은()나라 역시 동이족이었고 유학의 시조 공자 역시 동이족이었음을 그의 자손들이 밝히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사대주의는 결국 우리 조상을 향한 사대주의가 되는 것이고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다만 끊긴 민족의 연결점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명나라를 향했던 사대는 조선의 치명적인 비굴한 이성 상실이었음이 분명하다. 현재 윤 정부의 일본과 미국을 향한 사대는 훨씬 심각하고 부끄럽다. 머릿속에는 온통 북한과 핵, 그리고 전쟁의 두려움으로 가득하고 이를 막아줄 곳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망상이 오히려 전쟁의 전조가 되고 있음을 본인만 모르고 있다. 평소 우러르던 미국과 일본의 정상들과 나란히 자리할 수 있다는 기쁨과 잡아주는 손이 황송하겠지만 국민은 부끄럽고 불안하기만 하다. 신사대주의가 신 냉전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제 적은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가 추가되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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