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가람의 위 일기만 보아도 당시 영광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과 문학적 토양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가람의 또 다른 일기에는 양 조(兩曺). (). ()와 종일 시론(詩論). 시화(詩話)”라는 대목도 있는데 여기서 양 조는 조운과 조남령을 말한다. 춘원 이광수는 그의 <인생의 향기>라는 수필에서 조운을 천재시인이라 찬사했고, 시인 윤곤강은 <시와 진실>이라는 그의 평론집에서 조운의 <구룡폭포>에 대해 귀신이 통곡할 백미라고 극찬했다.

여기서 조남령에 대해 잠간 짚고 가야 할 대목이 있는데 조남령은 1920년생으로 조운보다는 20살 아래다. 그는 1940년 문장지에 한국 최초의 시조이론인 <현대시조론>을 발표 했는데 주된 내용은 가람 이병기 시조에 대한 고찰과 그 형태론이다. 그 논문이 발표되자 가람은 그가 큰소리 칠 날이 있을 거라 했고, 조운은 진실한 시인으로 참된 신인의 활약이 있을 거라 했다.

또 한명 중요한 인물은 1907년생으로 조운 보다는 7살 아래인 초정 조의현이 있는데 그는 집안 형님인 조 운을 핏줄 이상의 스승으로 모셨다 한다. 조운의 총애를 받으며 문학 수업을 하던 초정은 1933년 서울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그 해 일본 영문학과 입학, 1936년 일본 동지사대 경제학과 편입, 193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영광 여자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이력을 끝내는데 이유는 3년 후인 19496.25 발발 직전에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조운이 월북해버리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남은여생을 포기해버림으로써, 수많은 걸작을 남겼음직 한 그의 문학 열정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의 유고시집 만이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 외에도 1916년 생으로 갑술구락부 산하 문학동우회를 이끌면서 영광 체육단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말기에 옥고를 치른 우정(友汀) 정태병은 영광사람들에게 있어 불멸의 노래로 불리어지는 조응환이 작곡한 <추풍부>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 노래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라도 일원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1913년생인 조영직은 1959년 간행 된 <꽃피는 양지>라는 시집을 남겼고, 1910년생으로 전대 교수를 역임 했던 철학박사 이을호가 있었으며 그 당시 전기(前記) 된 대부분의 선배들과 시대를 풍미했던 유일한 현재의 생존자로서 1915년생으로 동국대 교수를 역임하고 우리나라 공자학회를 창립 한 철학박사 정종 교수있다. 정근모 조영규 등도 영광에서 시작 및 창작 작업을 통해 영광의 문기를 뿜어 낸 영광 근대 문학사의 마지막세대들이다.

이상은 시문학을 중심으로 살펴 본 영광 근대 문학의 배경인데 영광에서 수필 문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소청 조희관이 있다.

소청은 1905년 생으로 1958년에 작고하였는데. 연희 전문을 거쳐 북경 호수돈 대학 사학과를 4년 중퇴했다. 그는 해방 직후 광주사범 국어교사로 재직 하면서 처음으로 한글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방학 때는 일선 교사들에게 잊혀진 우리말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후 목포 항도여중 교장으로 재직시 문학 재건에 노력했으며, 문학지 <갈매기>와 신문 등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월북 작곡가인 당시의 음악교사 안성현에게 <부용산가>를 작곡, 보급 하도록 후원을 해주었다.

그가 영광에서 목포로 떠난 이유는 영광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며, 평생을 청렴결백한 선비의 모습으로 가난을 먹고 살아 온 그의 삶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청빈 그대로였다. 일화에 의하면 목포에서 살 때 해남 출신으로 혜화전문을 졸업한 이동주 시인과 가까이 지냈는데 이동주 시인의 뮤즈격인 여인이 구 목포 법원 옆에서 경영 하는 남가(南家) 다방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찾아가 눈을 감은 채 하루 종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또한 극작가 차범석의 친동생인 차재석이 소청의 전속비서 격으로 소청을 따랐는데 소청은 그를 시켜 목포의 문인을 총 규합 하기도 했다.(서단 증언)

이상이 소청의 문학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빈약하나마 필요한 소청 문학의 시대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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