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한명회(2)

한명회는 자신의 셋째 딸을 세조의 차남 해양대군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는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 산욕(産褥)으로 인하여 요절(夭折)하고 만다. 그 후 외손자 인성대군마저 일찍 죽으면서, 한명회는 사위인 해양대군과 다소 껄끄러운 위치에 된다. 그러나 이 해양대군이 곧 예종으로 즉위하게 되면서 한명회는 이조판서의 자리에 오르고, 곧이어 상당군(上黨君)에 책봉되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 후로 황해, 평안, 함길, 강원도 체찰사(體察使, 군무를 맡아보던 재상급 벼슬) 등을 역임하였으며, 숭록대부를 거쳐 보국숭록대부(1)로 승진했다.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병권(兵權)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6(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총칭), 변방 등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북방의 야인(野人)들을 토벌한 뒤 국방 경계를 견고하게 하였다는 공으로 한명회는 1461년 상당부원군에 임명되었고, 병조판서를 겸했다가 우의정이 되었다.

한명회 1에서 살펴본 대로, 한명회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의 왕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의 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권람, 신숙주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조 정권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인척 관계에 의한 요직 장악이라는 인사 폐단을 낳기도 했다.

예종 1년에는 남이 장군(충신의 대명사), 강순(康純, 영의정 때 무고로 몰려 사형)의 모역사건을 성공적으로 다룬 공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위 예종이 갑자기 죽자 한명회는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까지 정무를 맡아 보았으며, 이때에도 병조판서를 겸하며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자신의 넷째 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또다시 공신(功臣)의 명칭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딸인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권세도 하락하기 시작하였으며,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인 폐비 윤씨 폐출 사건(윤씨가 폐출되어 사약을 받아 사망. 아들인 연산군이 보위에 올라 여러 신하들과 후궁들을 죽이고 귀양을 보냄)에 관여하였다가 나중에 부관참시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한명회는 한강 가에 지은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그리고 1487, 7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는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에 묻히기를 희망하였으나 천안군(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안장되었다.

결국 한명회는 연산군 대에 와서 12 간신(奸臣)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 당하였으며,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시체는 토막 내어졌으며, 목은 잘리어 한양 네거리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중종 반정(中宗 反正) 이후, 신원(伸冤)되어 복관(復官)되었다. 한명회의 큰딸은 세종의 서녀(庶女) 정현 옹주의 아들 윤반과 혼인을 하였고, 그의 작은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와 혼인하였으며, 셋째 딸은 예종의 정식 왕비(장순 왕후)가 되었다. 막내딸은 성종의 정식 왕비(공혜왕후)가 되어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역사상 대표적인 간신(奸臣)의 이미지로 각인된 한명회.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자신의 딸들까지 왕가 및 권문 세족과 혼인하게 하여 권력을 이어가고자 했던 한명회, 과연 미래의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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