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정도전(1)

역사상 군주의 책사(策士)로 너무나 유명한 이사와 한명회, 그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철학자 쪽에 조금 더 가까운 인물이 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를 여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사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살았던 유학자, 바로 삼봉(三峰)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향리(鄕吏-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지방의 벼슬아치)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았다. 그 후, 개경에 올라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스승 이색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 우왕의 사부(師傅)를 지낸 원로 대신으로서 창왕을 옹립하여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고결한 선비의 표본인 학자를 스승으로 모셨던 정도전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성균관 박사와 태상 박사(나라의 제사를 관장하던 정6품 관직)를 거쳐 예의정랑(5품 관직)이 되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의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하여, 전라도 나주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다. 이인임은 공민왕 사후 우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은 다음, 충복들을 요직에 앉히는가 하면 매관매직 등 전횡을 일삼아 백성들의 분노를 샀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횡포에 화를 참지 못한 최영 장군과 이성계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떻든 한때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이인임에 의해 정도전은 여러 해 동안 유랑 생활을 견뎌내야 했던 바, 이 무렵 그는 초라한 초가집에 살면서 지역 주민들과 글 친구에게 음식을 얻어 먹기도 하고 손수 밭갈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뜰 날이 있다고 했던가? 드디어 1383,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은 그와 세상사를 논하고 인연을 맺었으며,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에 올랐다. 이 벼슬로 말할 것 같으면, 3품 당상관으로서 유학과 문묘의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던 바 성균관의 실질적인 최고위직이기도 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정도전은 고려 32대 왕이자 신돈의 사생아로 알려진 우왕을 폐하고, 그의 아들인 창왕(고려 33대 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밀직부사는 왕명을 전달하고 궁궐을 경호하며 군사기밀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2품 벼슬이었다.

이후 정도전은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을 달리 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도전은 이성계, 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를 폐위시키고, 공양왕(고려의 마지막 왕)을 즉위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높은 벼슬과 함께 공신전 100(30만평 이상의 밭)과 노비 10명을 하사받았다. 명나라에 가서는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모함을 해명하고 돌아와, 당시 고려의 최고 정무 결정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겸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정도전은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어 이성계, 조준(좌군총제사)과 함께 병권(兵權)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일환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불교 배척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이색과 우현보 등에 대한 처형을 상소했다. 입신 출세를 위해 스승(이색)마저 배반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우현보는 정몽주가 살해되었을 때, 그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러 주었던 인물이다. 이 일로 유배를 갔다가 석방되기도 했던 우현보는 이후 정도전 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되었으며, ‘2차 왕자의 난때에는 반란의 소식을 이방원에게 미리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진다. 그 역시 시류에 영합한 측면에서는 정도전 못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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