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가뭄이 들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었다. 경기도 광주의 검단산은 임금님이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다. 임금님도 하늘에 비를 내려주시기를 빌며 기우제를 지냈는데 가뭄이 들 때 한 고을의 수령이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행사였다. 영광군에는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산으로는 홍농읍의 금정산이었고 용왕제는 염산면 야월리 신촌마을 앞의 바다였다. 이 용왕제는 전설처럼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신촌마을의 용왕제는 바닷속에 제단이 있어 군수가 제관이 되어 바닷속에 들어가 수중 제단에 산돼지를 바쳐 용왕님께 제를 올리면 비가 온다고 전해 오고 있는데 용왕제를 지낸 후, 제관은 비가 오기 전에 영광읍 성안으로 들어와야만 살 수 있다는 계율이 있었다. 그 까닭은 제를 지낸 후, 비가 올 때 제관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벼락을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용왕제를 지낸 군수들은 벼락을 맞지 않으려고 바닷속 깊이 들어가 수중 제단에서 제를 올리지 않고 해변에서 제를 올리고 돼지를 물속에 던져 넣고서는 재빨리 되돌아왔다. 이처럼 성심으로 제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용왕제를 지내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약 300여 년 전 숙종 때의 이야기다. 남부지방에 내리 3년간이나 가뭄이 들어 나라가 어려움을 겪었다. 나라의 곡창지대인 남부지방에 가뭄이 들면 온 나라 백성들이 굶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나라에서는 구황촬요(救荒撮要)라는 책을 훈민정음으로 펴내어 한글만 아는 가난한 백성들도 굶어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내게 하는 비방을 쓸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고을마다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려주시기를 빌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백성들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대 흉년을 맞아 기아에 허덕이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었다.

이때의 영광 군수는 임호(林濠)라는 분이었다. 임 군수도 금정산에서 기우제를 정성으로 올렸으나 기다리는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에 임 군수는 마지막으로 신명을 다 바쳐 용왕제를 올릴 결심을 하고 재물을 준비하여 염산면 신촌마을 앞 수중 제단으로 향했다. 임호 군수는 목욕재계하며

내 오늘 벼락을 맞아 죽을지라도 바닷속에 들어가 제단에 제물을 성심껏 올리고 비를 내려주시기를 빌리라.”

작심하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제단에 산돼지를 바치고 용왕님께 신명을 다 하여 빌었다.

용왕님이시여. 지금 이 나라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다 굶어 죽어가고 있나이다. 제발 비를 내려주시어 불쌍한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주소서…….”

간절한 기도로 용왕제를 올린 군수가 바다에서 나와 걸음을 재촉하여 돌아오는 길이지만 바닷물에 흠씬 젖은 제복이 무겁게 발길을 붙잡는 바람에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영광 읍성이 눈앞에 보였다. 그때 일진광풍이 휘몰아오더니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군수는 지친 발걸음에 안간힘을 쓰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 그러나 어이하랴. 군수가 성문 십여 보 앞에 이르는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크게 일며 번갯불이 번쩍 긴 줄기를 뻗어내려 군수를 내려치는 게 아닌가. 임 군수는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작달비가 내리퍼부었다.

! 참으로 반가운 비로다. 삼 년 만에 맞아보는 이 비, 얼씨구~ 절씨구~ 좋고도 좋다.”

이 고을 백성들은 모두 밖으로 뛰어나와 삼 년 가뭄에 꿀물 같은 단비를 맞으니 힘이 저절로 솟아 즐거운 마음으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였다.

나중에 이 단비가 내리게 된 까닭은 사또가 용왕제를 지내고 벼락 맞은 덕분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 고장 사람들은 백성들의 살길을 열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군수님의 희생에 감복하였다. 다른 군수들은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 봐 성의 없이 용왕제를 지내서 제를 지내고도 효험이 없었는데 이 임호 사또께서는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직 고을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신 장한 수령님이라고 칭송하며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이심전심으로 놋쇠 숟가락을 모았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모은 숟가락으로 군수님이 고을 백성들을 사랑하는 성심을 기리며 추모비를 세워 사또님의 넋을 위로하였다. 이 임 군수의 추모비는 후일 이 고장에 부임하는 목민관들의 귀감(歸勘)이 되었다. 이 추모비는 일제가 놋쇠로 무기를 만들기 위해 갈취해 가려고 하였으나 영광 군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훼손만 하고 가져가지는 못했다. 해방 후 영광 사림(士林)들이 뜻을 모아 수선하여 군청 경내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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