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정도전(2)

어떻든 그 일(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스승과 친구에게서마저 등을 돌림)에 대한 인과응보였을까? 정도전은 그해(1391) 9월 평양윤(평양 시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대 세력들의 탄핵으로 경상도 봉화로 유배당하였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 일반사람)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어린 시절의 고향 경북 영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무렵 이성계가 황해도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탄핵을 받아 보주(고려와 금나라의 국경 요새)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올려진 후 충의군에 봉해졌다. 13924월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정도전은 7월 조준, 남은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장면은 바로 정몽주의 행태이다. 오늘날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도 처음에는 이성계와 정도전 쪽에 서서 최영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이성계의 비호 아래 출세의 가도를 달렸던 인물이다. 다만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는 데 대해서만 격렬히 반대했을 뿐이다. 그가 선죽교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살해한 태종 이방원이 자진하여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야 어떻든, 정도전은 조선 개국 직후 태조의 교지(敎旨, 국왕이 내리는 문서)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이어 1등 개국공신으로 여러 벼슬을 겸직하며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41월 병제(兵制) 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 전라, 양광 삼도도총제사(군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다.

한편,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세자로 책봉한 8남 방석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비(康妃) 소생인 방석은 이방원에 의해 폐위(廢位)되었고, 결국 방번과 함께 피살되고 말았다. 13948월부터 정도전은 고려의 세도가들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한양 천도를 추진하였으며, 현재 서울의 모든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이념적으로는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를 새로운 실천 덕목으로 제시하였다.

1398년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추진하면서 이방원(왕후 한씨의 5)을 전라도로, 이방번(계비 강씨의 1)을 동북면(함경도)으로 보내려 했다. 여기에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데, 다른 말로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이 난은 조선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정도전과 그에 못지않은 공을 세운 5남 방원 사이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다. 본래 태조에게는 여덟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이성계는 계비 강씨의 뜻에 따라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대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은 적극 지지하였던 반면, 이방원은 크게 분개하였던 것이다.

방원의 분노는 첫째, 자신의 생모인 한씨의 소생이 세자 책봉에서 무시당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창업공신으로서의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주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방원은 지모(智謀)가 뛰어난 하륜을 영입하고 무장 이숙번을 받아들이는 등,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대척점에 서있던 정도전 역시 세자 방석을 가르치는 자리에 앉을만큼 세력이 당당하였으며, 남은, 심효생 역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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