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올재'의 전설

영광 고을 관아는 원래 와우산 남쪽 산기슭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입이 잦아 동쪽으로 옮겼다고 하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성산(城山 146m)을 선창으로 계선주 삼아 배가 정박해 있는 모양으로 조성하였다. <곧올재>는 관람산과 옥녀봉 사이의 고갯길로 80m의 높이로 이 고개를 넘으면 묘량면 연성리 성동 마을이며 대마면을 거처 장성으로 가거나 고창을 지나 한양으로 가는 길이다. 육십여 년 전까지도 이 고개를 넘어 장성과 영광의 경계인 태청산(593m)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던 고개이며 대마와 고창군 대산으로 가는 큰길이어서 내왕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개이다. 이 고개의 이름이 <곧올재>가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백제 근초고왕이 370년 이 고을을 점령하기 전에는 마한의 한 부족국인 성진국(城眞國) 이었다. 이 성진국에 한 금실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인 도손은 열심히 농사를 짓는 부지런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근동의 어른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젊은이였다. 아내가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자 도손은 고된 일을 하면서도 예쁜 자식을 얻을 생각을 하니 신바람이 나서 저절로 일하는 손이 빨라지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부족이 쳐들어 왔다. 성진국 군사들은 죽을힘으로 막았으나 워낙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침범으로 밀리는 형편에 주민들은 옥등재를 넘어 태청산으로 피난을 하였다. 도손은 만삭이 된 아내를 업고 피난을 하는데 옥등재 모롱이에 다다르자 아내가 크게 진통을 하는지라 내려놓으니 아내는 엄청난 진통 끝에 아기를 낳고는 혼절하였다. 피난 가는 사람들은 모두 재를 넘어 가버리고 혼자 남은 도손은 한 번도 아기를 받아 본 일이 없이 처음 겪는 일인지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는데 아내가 무어라고 작은 소리를 내어 귀를 가까이 대고 들어보니 물! ! 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신음이었다. 고갯마루에서 물을 구할 길이 없는 도손은

여보! 곧 올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하고 적병들이 우글거리는 읍내로 달려 내려와 샘에서 물을 뜨는 순간 적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네 놈은 웬 놈이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망갔는데 네놈만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적의 첩자가 분명하다.”

하고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저는 첩자가 아닙니다. 피난길에 아내가 아기를 낳아 물을 가지러 내려왔습니다. 방금 아기를 낳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으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하고 울면서 매달렸으나 끝내 적군들은 도손을 살려두지 않았다. 도손을 죽는 순간까지도 곧 갈게!”를 속살이며 숨을 거두었다. 도손의 아내는 돌보는 이 없이 고갯마루에서 핏덩이 아기를 품고 곧 올게!”를 되뇌며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처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보니 아내는 고갯마루에서 마을 쪽을 향해 손을 뻗고 도손은 우물 옆에서 고개를 향해 손을 뻗고 죽어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도손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아내를 향해 곧 올게! 조금만 참아.” 하고 외치며 마을로 내려가는 모습이 생각나 이 부부와 아기를 고갯마루에 묻어주고 난 뒤부터 이 고개를 <곧올재>로 불렀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적의 침공에 나라를 지키지 못하여 불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약한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슬픔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로도 영광 고을의 백성들은 왜구의 침공 때마다 슬픈 눈물을 흘리며 이 고개를 넘었다. 이 재에 스며있는 정신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지혜롭고 바른 정치를 하여 강한나라, 힘 있는 나라, 온 백성이 마음 놓고 복되게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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