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10 총선이 43일 앞으로 다가왔다. 민주당은 지난 25일 총선 45일을 남겨두고 영광선거구 후보로 이개호 현역의원을 단수후보로 발표했다. 후보자 심사발표를 20일 가까이 끌어오던 민주당 공관위의 후보자 심사발표에 70일 넘게 표밭을 갈았던 3인의 예비후보는 단수 공천에 반발하며 재심 신청을 했다. 현재까지 후보군은 이낙연 대표의 새로운 미래로 합류한 김선우 전 복지TV사장, 함평 출신인 곽진오 개혁신당 전남도당위원장, 선거단골 김천식 전 공무원이 기독당 후보로 나설 전망이다. 3월 초 후보 윤곽이 나오면 본격적인 선거 판세가 예상된다. 영광신문은 창간특집으로 역대 국회의원 선거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영광선거구변천사제헌부터 5·8단독선거구

 

6,7대 함평과 합구, 9~12대까지 ‘2인 선출중선거구제

13~17대까지 함평 통합선거구, 18대 장성 합구, 19대부터 담양 합구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키워온 선거는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7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4.10 22대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의 역사와 변화를 살펴봤다.

해방 후 처음 치러진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 21살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한 표씩 주어지는 평등선거 원칙이 적용됐다. 국회의원 수는 200, 95.5%의 매우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3대 총선은 6.25 전쟁 이후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휴전선 이북의 7개 선거구를 제외하고 203곳에서 투표가 진행됐다.

4.19혁명을 거쳐 치러진 제5대 총선에서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양원제가 처음 도입됐으며 민의원과 참의원이 각각 따로 선출됐다. 하지만 1961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모두 채우지 못하고 다음 선거가 치러졌다. 헌정 사상 최초로 전국구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건 제6대 총선이다. 의원 정수는 역대 가장 적은 175명으로 대폭 줄었다. 7대와 8대를 지나 유신헌법 제정 이후 시행된 9대 총선에서는 한 선거구당 2명의 의원이 선출되는 중선거구제가 시행됐다. 또 유신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73명은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됐다.

이렇게 70년대와 80년대 중반을 지나 1988년 제13대 총선은 6.10 민주항쟁 이후 진행된 첫 선거다. 국회의원 의석수는 299,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적용됐다.

2000, 16대 총선에서는 선거제도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때이다. 후보자의 전과 기록이 공개됐고 사상 처음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형 선거공보와 함께 부재자 투표 안내문이 발송됐다. 이어 4년 뒤 치러진 선거에선 지역후보자 외에 정당에 또 한 번 투표하는 지금의 12표제가 시행됐다. 또 선거범죄 신고 포상금제와 같은 깨끗한 선거를 위한 각종 장치가 마련됐다.

19대에 들어서는 국회의원 300인 시대가 개막했다. 20127월 출범을 앞두고 있던 세종특별자치시에 대한 선거가 따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재외선거 도입으로 선거권 보장도 확대됐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첫 사전투표가 도입된 20대 선거를 거쳐 21대 총선에서는 만 18살 이상 국민에게 선거권을 줬다. 국회의원 수는 300명으로 같다.

한편, 영광의 국회의원 선거구는 제헌부터 5대까지 그리고 8대만 영광군 단독선거구였다. 5.16군사혁명 이후 박정희 정부가 국회의원 정수를 축소하면서 6대와 7대에 함평군과 합구됐다. 19739대부터 12대까지는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해 영광과 함평, 장성이 한 선거구로 선거를 치렀다. 1988년 다시 1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의 시행으로 13대부터 17대까지 함평군과 통합선거구가 유지됐다가 2008년 선거구 인구 하한선 미달로 인해 18대에는 다시 영광과 함평, 장성 선거구로 조정돼 2명 선출이 아닌 1명을 선출했다. 19대부터 21대까지는 담양군이 합구돼 공룡선거구가 됐다.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77년 동안 수많은 선거를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43일 앞으로 다가온 제22대 총선의 결과가 기대된다

 

제헌조영규 한국민주당 무투표영광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준 내전적인 상황에서 1948510일 임기 2년의 제헌 의원 198명이 당선됐으며, 제주도에서 1년 뒤에 2명이 선거를 치러 총 200명이 선출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선거 때문에 정당정치가 생소한 시대적 상황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주당 등 좌익계와 남북협상파, 중립계 정치인이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또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구분이 모호한 형태로 후보자가 출마했다.

전남의 선거구는 29개 구로 92명이 입후보했으며 이 중 28명이 대학을 졸업했고 그 외는 중졸 정도였으며 일본 강점기에 항일운동 경력이 특징이다.

선거 결과 무소속 8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 한국민주당 29, 대동청년단 12, 조선민족청년단 6, 대한노동총연맹 1명이 당선됐다.

영광군의 제헌 의원은 한국민주당의 조영규(曺泳珪)가 무투표 당선됐다. 영광군 군남면 태생인 그는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와 중국 베이징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해 일경의 주목을 받았으며 해방 후 독립촉성회영광군지부장과 민족청년단 영광군단장, 영광군체육회장을 지냈으며, 군정 때 의사시험에 합격해 출마 당시 직업은 영광보건진료소장이었다.

영광 국회의원 역대 최고 다선인 4선의 조영규는 능변의 투사로서 한민당을 시작으로 민국당과 민주당, 신민당으로 이어지는 정통 야당의 길을 걸어왔다

 

2‘161 경쟁률한청 정헌조 당선

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0530일 시행됐다. 210명을 선출했다. 이승만은 예정된 총선에서 패배가 예상되자 이를 12월로 연기하려고 했으나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엄중 경고, 예정대로 열렸다. 선거 결과, 무소속 126, 대한국민당 24, 민주국민당 24, 국민회의 14, 대한청년단 10, 기타 17개 정당 단체에서 1~3명이 당선됐다.

의정 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구성됐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2대 선거는 210명 당선자 중 무소속당선자가 126명으로 60%를 차지해 정당정치의 뿌리가 약한 시대적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임을 보여주었다.

전남은 30개 선거구에 241명이 출마해 8.31의 경쟁률을 보였고 영광군이 전남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161의 경합을 벌인 결과 한청 소속의 정헌조(鄭憲祚)가 당선됐다.

이때부터 영광정치의 양대 산맥인 ·의 대결 시대가 열려 제헌 의원인 조영규는 3위에 그쳤다. 이 선거에서 조영규의 표를 분신시키기 위해 조영규의 비서관이었던 김창집을 회유 출마시켰으며, 읍면별로 1명 이상의 후보를 출마시켜 지원했다.

정헌조는 항상 여당 쪽의 성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 1공화국 때는 자유당, 3공화국 때는 공화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모두 6번 출마해 재선했으며, 6대 국회에서 보사위원장을 역임했다

 

3첫 정당 공천제 민주국민당 조영규 재선

3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4520일 시행됐다. 203명을 선출하는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입후보 정당 공천제로 치러졌다.

전남은 30개 선거구에서 평균 5.6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국회의원 정수는 제2210인에서 203인으로 줄었다. 이는 휴전 협정 결과 7개의 선거구가 휴전선 이북에 속해 있어 선거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 말기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치러진 결과 자유당이 정치공작에 총력을 다해 114(56.1)을 당선시켰다.

민주국민당이 15, 국민회의와 대한국민당이 각각 3명씩, 무소속이 68명이 당선됐었으나 자유당의 압승으로 국회를 장악했으며, 장기 집권을 위한 1127일 사사오입 개헌의 기틀을 마련했다.

영광군에서는 민주국민당의 조영규가 정헌조를 이기고 재선했다. 이 선거에는 조봉암의 비서를 지낸 서진걸(徐進傑) 4명의 후보가 입후보했다.

 

4민주당 조영규 ‘3선 성공

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852일 시행됐다. 233명을 선출했다.

4대 선거는 자유당이 개헌을 위한 의석수 확보에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선거 결과 자유당 126, 민주당 79명이 당선돼 민주당이 호헌의석을 확보했으며, 무소속 27, 통일당 1명이 당선됐다.

1952년과 195411월 공포된 개정헌법에 따라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을 구성하려 했으나 국회통과가 미루어지다 제3대 임기 만료 시 민의원선거법이 통과됐다.

4대 국회는 603.15부정선거에 항거한 4.19로 인해 422일 시국수습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를 수리했으며, 내각책임제 헌법 개정으로 인해 2년 만에 임기를 마쳤다.

전남은 32개 선거구에 108명이 입후보해 3.41의 경쟁률을 보였다. 영광군에서는 5명이 입후보해 민주당의 조영규가 자유당 공천자인 이강후와 무소속 정헌조 등을 물리치고 3선에 성공했다.

 

5민주당 조영규 ‘4선 고지올라

5대 국회의원 선거는 1960729일 시행됐다. 민의원 233명과 참의원 58명을 선출했다. 민의원선거는 1선거구에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참 의원선거는 1선거구에 2~8인을 선출하는 대선거구제로 시행됐다.

5대 선거는 4.19를 거친 헌법 개정으로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채택 시행한 결과 민주당이 민의원 233명 중 175석을 차지하는 압승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었으며, 무소속 49, 사회대중당 4, 자유당 2, 한국사회당 1, 통일당 1, 헌정동지회 1석을 기록했다.

전남은 32개 선거구에는 163명이 등록해 5.11의 경쟁률을 보였다.

영광군에서는 민주당의 조영규가 무소속의 정헌조를 누르고 4선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1961516일 발발한 5·16 쿠데타로 인해 9개월 18일 만에 임기를 마쳤다.

군사혁명 세력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해 1961526일부터 6대 국회 하루 전인 19631216일까지 국회 기능을 대신했다.

 

6공화당 정헌조 오랜 기다림 재선

6대 국회 의원선거는 19631126일 시행됐다. 175(지역구 131, 전국구 44)을 선출했다. 6대 선거는 5.16 쿠데타 후 창당된 민주공화당이 전국구제(비례대표)를 도입해 전체의석의 62.8%에 해당하는 110석을 획득했으며, 민정당 41, 민주당 13, 자민당 9, 국민의당 2석이며, 후보 등록 시 정당공천을 필수사항으로 무소속 출마가 봉쇄됐다.

전남은 19개 선거구로 조정됐으며 전남 제18지구인 영광군과 함평군이 통합선거구로 공화당 공천자인 정헌조가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조영규는 친구인 민주당 구파 소속인 함평의 김의택과 합의해 서울 성북에서 출마하고 그의 아들인 조기상이 입후보했다. 당시 26세인 조기상은 영광의 정헌조 표를 잠식해 김의택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정헌조의 당선은 영광과 함평에서 3대와 45대까지 조영규와 김의택이 연속 당선됐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지역개발이 뒤떨어진 데 따른 정헌조의 지역개발 공약의 성과로 분석된다.

이 선거부터 도시는 야당이 농촌은 여당이 승리하는 여도야촌(野都輿村)이 형성됐다.

 

7윤인식 함평 출신’ 1호 당선

7대 국회의원 선거는 196768일 시행됐다. 175(지역구 131, 전국구 44)을 선출했다. 7대 선거는 11개 정당이 난립한 가운데 공화당이 73.9%129석을 차지했으며, 신민당 45, 대중당 1석에 머물렀다.

전남 19개 선거구 중 영광선거구는 영광출신 3명과 함평 출신 3명이 입후보했으나 공화당 공천자인 함평 출신 윤인식이 당선됐다.

조영규는 이번 선거에 마지막으로 입후보했으며 그 후부터는 아들인 조기상을 지원했다.

7대 국회는 1969914일 새벽 야당이 농성 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하는 오명을 남겼다.

 

8영광사람 공화당 박종진 초선

8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1525일 시행됐다. 204(지역구 153, 전국구 51)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공화당 113, 신민당 89, 국민당 1, 민중당 1석을 차지했다.

8대 선거는 전남이 22개 선거구로 확대되고 영광은 단독선거구로 변경됐다.

이 선거에서 박경원 전 내무장관의 지원을 받은 박종진이 정헌조 전 의원 비서관을 지낸 정병원을 눌러 당선됐다.

박종진은 완도군 내무과장을 마지막으로 지낸 행정직 공무원으로서 공화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으나 유신헌법 발동으로 13개월 만에 임기를 끝냈다.

8대 국회는 득표율에 있어 민주공화당(48.7%)과 신민당(44.3%)이 양분하면서 양당체제가 확립됐으나 1972101710월 유신으로 13개월 만에 해산됐다.

대통령을 의장 등으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가 19721018일부터 1973311일까지 국회의 기능을 수행했다

 

9‘2인 선출함평 윤인식·이진연 동반 당선

9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3227일 시행됐다. 각 지역구에서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153명을 선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유신정우회 소속 73명을 포함 216명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지역구 의원은 공화당 73, 신민당 52, 통일당 2, 무소속 19명이 당선됐다.

19721230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제정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인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임기 3년의 유신정우회와 임기 6년의 지역구의원이다.

9대 선거부터 중선거구제가 시행되면서 전남은 10개 선거구로 조정돼 영광과 함평에 장성이 합구돼 2명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함평 출신 윤인식과 이진연이 동반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함평 출신은 윤인식과 이진연이, 영광출신 정헌조, 장성출신 김상복이 출마해 군대항전을 펼쳤으나 군세가 가장 열세인 함평 출신 윤인식이 8대에 이어 당선됐으며, 이진연이 초선의원이 됐다. 영광은 3개 군 중 가장 많은 인구인데도 불구하고 의원이 없는 지역이 됐다

 

10장성 김재식·함평 이진연 당선

10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81212일 시행됐다. 231(지역구 154, 유신정우회 77)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지역구 의원으로 공화당 68, 신민당 61, 통일당 3, 무소속 22명이 당선됐다.

전남 10개 선거구 중 영광선거구는 장성출신 김재식과 함평 출신 이진연이 당선됐다.

영광의 조기상과 김연관은 낙선했다. 조기상은 192표 차로 패하자 법원의 재검표 과정까지 거쳤으나 뒤집지는 못했다.

10대 선거는 득표율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차지하면서 31.7%를 기록한 공화당에 앞서는 상황이 벌어지며 정국의 주도권을 야당이 거머쥐면서 여권이 흔들리기 시작해, 급기야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유신체제가 붕괴했다.

이로 인한 신군부의 등장으로 광주항쟁이 발발하고 전두환의 국보위입법 회의로 인해 1980102717월 만에 국회가 해산됐다.

국회 기능을 대신하는 국가보위 입법 회의가 구성돼 19801026일부터 1981410일까지 국회 권한을 대행했다

 

1110년만에 조기상·이원형 동반 당선

11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1325일 시행됐다. 276(지역구 184, 전국구 92)을 선출했다. 11대 선거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81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이 총 276석 중 151석을 확보했으며, 민한당 81, 한국국민당 25, 민권당 2, 신정당 2, 민사당 2, 민농당 1, 안민당 1, 무소속 11석이다.

전남 11개 선거구의 영광선거구에서는 민정당 조기상과 신정당 이원형이 당선됐다. 두 사람 모두 영광 출신으로 동반 당선된 것이다.

조기상은 3대 선거 때부터 부친의 선거유세를 시작으로 50년 이상을 정치 현장에 있었다.

모두 8번 입후보해 2번 당선하고 6번 낙선했다. 당선 전적 2번과 12, 13, 14대를 3번 낙선했다. 15대에는 출마하지 않았으나 16대에 자민련으로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무장관으로 일했다. 이원형은 15회 고등고시에 합격, 서울 지검검사, 제천지청장 등을 역임한 뒤 변호사로 일하다 11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2대에 낙선하고 13대는 서울 은평을에 출마해 패했으나 14대에 당선됐다. 15대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낙선하였으며, 김대중 정부 시절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냈다

 

12영광 조기상 재선’, 함평 이진연 ‘3

1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5212일 시행됐다. 276(지역구 184, 전국구 92)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민정당 148, 신민당 67, 민한당 35, 한국국민당 20, 신정당 1, 신민주당 1, 무소속 4석을 기록했다.

전남 11개 선거구 중 영광선거구는 영광출신 조기상과 함평 출신 이진연이 당선됐다.

영광 이원형과 장성 백상규와 김상복이 낙선하고 단독 출마한 함평 이진연이 함평지역 몰표로 당선됐다. 선거 이전 관제 야당에 대한 반발로 19851월 신민당이 창당됐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어 이민우를 총재로 창당했으며, 총선 직전인 28일에 김대중이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야당 바람이 일기 시작해 67석을 획득하면서 35석에 그친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자리 잡았다. 선거 후 43일 민한당 당선자 32명이 신민당에 입당하면서 합당됐다.

 

13함평 서경원 밀입북 의원상실, 경북칠곡 이수인 입성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1988426일 시행됐다. 299(지역구 224, 전국구 75)을 선출했다. 1987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국회의원 선거구는 1선거구 2인 선출의 중선거구제가 폐지되고 1선거구 1인 선출의 소선거구제로 바뀌었다.

198751일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통일민주당이 창당됐으나 1112일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분열했다.

선거 결과 민정당 125, 평민당 70, 통일민주당 59, 신민주공화당 35, 한겨레민주당 1, 무소속 9명이 당선했다.

야권이 분열된 가운데 시행된 13대 선거는 다시 장성이 떨어져 나가고 영광과 함평으로 치러진 결과 황색 바람을 일으킨 평민당 공천자인 함평 서경원이 당선됐다.

광주 5개 선거구와 전남 18개 선거구에서 평민당 후보가 싹쓸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신안에서 한겨레민주당으로 당선된 박형오는 선거 직후 평민당에 입당)

서경원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북한에 밀입북해 국가보안법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1990119일에 열린 보궐선거에서도 평민당이 경북 칠곡 출신 이수인을 영호남 화합을 앞세우고 공천해 김대중의 적극 지원으로 당선됐다.

199029일 민정당 노태우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3당을 통합,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14민주당 김인곤 재선

1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92324일 시행됐다. 299(지역구 237, 전국구 62)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민자당 149, 민주당 97, 통일국민당 31, 신정치개혁당 1, 무소속 21석을 기록했다.

전남 19개 선거구 중 영광선거구는 민주당 공천자인 김인곤이 황색 돌풍으로 당선돼 재선의원이 됐다.

영광 출신은 김인곤, 조기상, 김기수가 함평 출신은 이진연, 안평수가 출마했다. 재선의원인 이진연은 14대 선거 낙선으로 더는 출마하지 않았다.

김인곤은 인성고와 광주대학교 설립 운영하면서 13대 때 공화당 전국구 1번으로 국회에 입성해, 9075·18 관련 승용차 강제견인 사건 이후 3당 합당으로 몸담게 된 민자당을 912월 탈당하고 5월 신민당에 입당했다

 

15김인곤 ‘3선 영광뒤 투신

15대 국회의원 선거는 1996411일 시행했고, 299(지역구 253, 전국구 46)을 선출했다. 전남선거구가 17개로 축소된 15대 선거의 영광선거구는 김인곤이 3선에 성공했다.

황색 돌풍으로 14대와 15대에 당선돼 3선을 지냈으나 이후 16대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20043월 광주대 총장실에서 투신했다.

한나라당 양근수와 민주당 김기수 등이 특별한 지지층을 만들지 못하고 황색 바람이 계속되면서 압승했다. 15대 선거 결과 총 신한국당이 139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으며, 국민회의 79, 자민련이 50, 통합민주당 15, 무소속이 16석을 차지했다.

이는 1995225일 김종필이 자민련을 창당하고 627일 시행된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고 평민당이 승리하면서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을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가 95일 창당됐으며, 12월 민자당은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했다.

 

16첫 여당민주당 이낙연 정치 입문 40초선

16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0413일 시행됐다. 273(지역구 227, 전국구 46)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 133, 새천년민주당 115, 자민련 17, 민주국민당 2, 한국신당 1, 무소속 5석을 기록했다. 정당별 득표율도 한나라당 39.0와 새천년민주당 35.9로 비슷하다.

199812월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면서 새천년민주당 여당으로 변모했다.

16대 선거의 전남선거구는 13개로 줄어들었다. 영광선거구는 민주당 공천자인 이낙연이 당선됐다. 영광 출신인 장현과 조기상이 차순위를 기록했다.

이낙연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맺은 김대중과의 인연으로 김인곤을 밀어내고 공천을 따낸 뒤 정치 입문 불과 40여 일 만에 금배지를 달았다. 언론인 출신으로 특유의 화법이 높은 평가를 받아 당의 대변인을 6차례나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까지 지냈으나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17대 선거에서 탄핵 태풍을 이겨내고 재선됐으며 18대에는 3선에 성공했다.

20021219일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됐으며, 2004312일 국회에서 찬성 193,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켜 탄핵 역풍의 원인을 제공했다

 

17‘12민주당 이낙연 재선 성공

17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4415일 시행됐다. 299(지역구 243, 비례대표 56)을 선출했다. 17대 선거는 탄핵정국에서 치러진 결과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과반수 확보를 이루었으며, 한나라당은 121, 민노당은 10, 민주당은 9, 자민련 4, 무소속 3석으로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은 완패하고 탄핵을 당한 열린우리당은 완승했다.

전남 13개 선거구는 물론 영광선거구에서도 탄핵 바람은 불었으나 민주당 이낙연이 열린우리당 장현의 도전을 물리쳤다.

17대 선거부터 과거 지역구 득표율에 따른 전국구 의석을 배정을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2표제를 최초로 시행했다.

 

18후보 없는 장성합구 이낙연 ‘3선 영광

18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849일 시행됐다. 299(지역구 245, 비례대표 54)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 153, 통합민주당 81, 자유선진당 18, 친박연대 14, 민주노동당 5, 창조한국당 3, 무소속 25석을 기록했다.

이낙연이 3선에 성공한 18대 선거는 영광, 함평 선거구가 인구 하한선인 104천 명에 미달해 전남지역 선거구를 12개 선거구로 조정한 결과 장성이 합구됐다. 선거는 200712월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이 당선된 이후 호남 푸대접이 재현되며 지역 민심이 민주당 살리기로 집중되면서 이낙연, 한남열, 김영수 등 영광출신 3명과 함평 출신 이상선이 출마하고 장성에서 후보자가 없는 선거전이 펼쳐졌다.

선거에서 특별한 인물의 출마자가 없는 데다 호남지역 민주당 바람에 힘입어 이낙연이 자신의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며 낙승했다.

 

19이낙연 4전남지사로’, 이개호 보궐입성

19대 국회의원 선거는 2012411일 시행됐다. 세종시의 합류로 1석 늘어난 총 300(지역구 246, 비례대표 54)을 선출했다. 선거 결과, 새누리당 152, 민주통합당 127, 통합진보당 13, 자유선진당 5, 무소속 3석을 기록했다.

이낙연이 4선에 성공한 19대 선거는 함평과 영광, 장성에 이어 인구 하한선으로 담양군이 합구돼 4개군. 공룡선거구가 탄생했다. 전남지역 선거구도 12개에서 10개로 2석이 줄어들었다. 담양 출신이 없는 이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이낙연은 새누리당 이상선과 통합진보당 김동주를 넉넉하게 따돌리고 조영규에 이어 영광출신 4선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전남도지사에 출마하면서 의원 퇴직으로 그해 24년 만에 열린 7.30 보궐선거에서 담양 이개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새누리당 이중효 후보를 상대로 81%의 지지율을 보이며 정치 입문 2년 만에 금배지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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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개호 전남 유일 생존 재선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2016413일 시행됐다. 300(지역구 253명 비례대표 47)으로 더불어민주당 123, 새누리당 122, 국민의당 38, 정의당 6, 무소속 11석을 기록했다. 호남에서 녹색 바람을 일으킨 국민의당 강형욱이 출구조사에서 경합 우세로 나타났으나 실제 개표 결과 더불어민주당 이개호가 접전 끝에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호남에 불어닥친 국민의당 바람 속에 민주당 후보가 줄줄이 낙선하는 과정에서도 전남에서는 유일하게 생환한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다.

복합 지역구에서 흔히 보이는 소지역주의가 이개호의 생환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함평군, 영광군, 장성군에서 모두 근소한 차이로 국민의당 강형욱이 앞섰지만, 이개호의 고향인 담양군에서 59.89% vs 35.93%로 이개호가 23.96%p 차로 크게 앞서면서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대회에서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될 것 같다.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 다 잃고 혼자 왔다며 울먹이다 눈물을 보였다.

 

21단수 공천이개호 3선 전국 1호 당선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2020415일 시행됐다. 300(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으로 더불어민주당 180, 미래통합당 103, 정의당 6, 국민의당 3, 열린민주당 3, 무소속 5석을 기록했다.

현역 이개호는 단수 공천을 받으면서 3선에 성공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4대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을 소화하면서 나름 농촌 지역에서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던 데다가, 호남의 더불어민주당 지지도 굳건한 상황이라 국민의당 돌풍에 어려움을 겪었던 4년 전 국회의원 선거 때본다는 훨씬 좋은 상황. 민생당에서는 김연관 전 전라남도의회 의원이 후보로 등록했다.

더불어민주당 이개호가 80%가 넘는 득표율로 일찌감치 당선을 확정 지으면서 전국에서 가장 먼저 당선인으로서 이름을 올리게 됐다. 4년 전 전라남도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겨우 신승해 홀로 살아 돌아왔을 때와 비교해보면 더욱더 상전벽해가 됐다. 거기에다가 지역구 의원을 지낸 적이 있던 이낙연 전 의원의 영향력도 직접 받는 곳이라 이처럼 압도적인 득표율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예비 후보로 등록했다가 탈당해 무소속으로 선거를 나간 김선우는 선거구가 4개 군으로 구성되어서 발생한 소지역주의와 더불어민주당, 민생당이 모두 싫어 무소속 후보를 찍는 유권자들 덕분에 11.66%를 득표하며 선거 비용 반액을 확보했다. 세부적으로는 담양군에서 이개호에 90.64%의 몰표를 쏟아내 김선우가 4.45%에 그쳤지만, 영광군에서는 13.73%, 함평군에서는 22.71%를 득표하며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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