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쇼파와 작은 새싹 김소현 영광고등학교 2학년

모두들 추석음식 만들기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신이 난 추석 전날이었다. 그러나 우리집 식구는 이 날도 염전으로 나서야만 했다. 아무리 빨간 날이라고 해도 소금이 오늘날엔 소용없다. 그것이 내 부모님들의 직업이고 우리집 생계유지 수단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몇 년전부터 아빠 염전일을 돕기 시작함으로써 매번 허리가 아프셔서 쓰디쓴 한약을 여름 때마다 떼어 보신 일이 없었다. 남자도 하기에 무지 고된 일인데 여자인 엄마가 하려니 무지 힘드시겠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사는 게 무엇이고 돈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엄마를 괴롭히는 건지... 하지만 나는 안다. 전보다 조금이나마 삶이 여유로울 수 있는 건 힘든 역경 속에서도 부모님은 견디셨기 때문이다. "엄마 그래도 명색이 한국의 큰 명절이고 쉬는 날인디 염전일 꼭해야 하는 거여?" "어쩌것냐! 소금이 우리에겐 돈인디... 소금도 인자 많이 안나오니께 넌 오지 말고 있어. 아빠랑 엄마랑 해도 된께." 엄마가 힘드니 오지 말라는 소리에 순간 귀가 솔깃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제도 엄만 잠자릴 뒤척거리다 끙끙대며 잠이 드셨으니까... "어! 아직 소금이 덜 왔어야. 난 일 좀 보고 있을랑께 소현이랑 당신은 저기 그늘 가서 쉬고 있어."

이제 제법 날씨도 선선해지고 햇볕도 선해졌기 때문인지 여름 때완 달리 염전의 기온은 그다지 사람을 잡아먹을 만큼 후덥지근하지도 않고 소금도 적게 나오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쇼파 두 개를 창고 뒤 그늘로 옮겨갔다. 물론 쇼파는 집안에서 쓰다가 다 떨어져 볼품없이 되어버린 염전의 모래흙이 쌓여있는 낡은 쇼파들이었다. 처음엔 그 쇼파에 앉으려니 조금은 거북스러웠지만 점점 갈수록 내 집마냥 편안해졌다. 가을바람이 제법 선선하면서도 이따금 싸늘하게 내 몸을 어루만졌고 역시 나 하늘의 구름들은 에메랄드 속에서 뭉게뭉게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가을의 정경을 보며 감탄사를 머금지 못하고 있자 엄마는 빙그레 웃으시며 "네 나이 때가 참 좋을 때지." 라는 말 한마디를 하시고선 어느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키셨다. "여기 앉아있음 엄마도 보이고 참 좋아. 저기 보이지? 소현." 엄마가 가리킨 곳은 맞은편 산에 있는 외할머니의 산소였다. 정말 한눈에 외할머니의 산소가 나의 시야에도 잡히었다. 유난히도 손자, 손녀들 중 나를 가장 예뻐하셨던 할머니이셨기에 나 또한 할머니를 무지 따르고 좋아했었는데... 엄마는 슬쩍 눈가에 물기가 촉촉해지더니 이내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니 외할머니는 참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양반이었어. 아들, 딸자식들한테 도움 받거나 피해준다고 생각되면 곧 죽는 줄 알고 혼자 따로 살았다. 더 늙어서도 짐 되지 않았지 않았냐!..." "그땐 정말 늙은이가 내 도움도 전혀 안 받을려고만 하고 참 미련해 보이드라. 하긴 내가 도울 틈도 없이 바빴제. 인자, 나도 마흔이 넘어가니까 그 맴 알것다. 우리 어매는 말여. 자기 몸 다쓰러져 죽어가도 자식부터 챙겼단다. 니 할머니 여기서 살 때 우리 형편이 워낙 안 좋고 가난했냐 잉. 근께 아파도 아프다 말도 않고 그렇게 바보같이 폐암으로 허망하게 가버리더냐 아무튼 노인네. 좀만 참고 더 살제. 이제 좀 여유가 생기는데 맛난 것도 해주고 싶고 근디. 엄만 한이 된다. 나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엄마 얼굴 한번 더 볼 것을..."

엄마는 울고 계셨다. 나 또한 마음이 아려왔다. 가난한 삶속에서 바둥거리며 살려고 악착같이 돈을 벌기 위해 어미건강 한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일이 늘 한이 된다던 가엾은 내 어머니. 나는 두 팔을 벌려 엄마를 감싸안았다. 두 팔로 감싸안은 엄마의 몸은 유난히도 가냘프고 여렸다. "엄마. 엄만 할머닐 닮으면 안돼! 엄마처럼 마음 아프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나 엄마에게 잘 할거야. 그러니깐 엄만 늘 내 곁에만 있으면 돼. 그리구 만약 엄마 몸이 다 쓰러질 듯할 땐 내가 아닌 엄마를 봐. 여지껏 힘든 나날 속에서도 엄만 나를 돌보기에 바빴잖아. 엄마. 내가 엄마를 사랑하고 감사해하고 있다는 것 절대 잊어선 안돼. 그리고 건강해야해."

나의 눈가에서도 작은 물방울이 붉은 석류알처럼 알알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 근데 이게 뭐야? 새싹이잖아?" 다 낡아 빠져 볼 품 없어진 검은 쇼파의 틈 사이에서 파릇파릇 작은 새싹이 놀랍게도 자라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어디선가 바람결에 날아온 민들레 씨앗이 쇼파 틈 사이에 있는 흙속에 뿌리를 내린 모양인데, 흙이 많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물을 누군가가 주는 것도 아니고, 자라나기엔 아주 열악한 조건으로만 보이는데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싹은 살아있다는 것을 나도 생명이라고 알리고픈 것인지 유난스레 그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엄마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할머니처럼, 엄마처럼 자식을 보호하려는 늙고 낡아버린 검은 쇼파로 인해 새싹이 그나마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엄마, 저 낡은 쇼파와 푸른 새싹 말야. 넓은 엄마의 품안에 쌔근쌔근 평온히 잠든 어린아이 같아. 참보기 좋아." 엄마는 대답대신 좀 전에 흘렸던 눈물을 말끔히 다 지운 듯 밝게 웃어주셨다. "여보! 소현아. 이제 소금 많이 나왔으니깐 일 시작하자고 잉." 아빠의 말에 재빨리 장화를 신고 염판으로 나가는 엄마를 보고 나도 냉큼 엄마 뒤를 따라갔다. 그리곤 엄마를 덥석 안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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