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태두 故 현암 이을호선생(1910-1998)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사적비가 그의 고향인 영광읍 우산공원에 세워졌다.

지난 달 27일 오후 2시, 영광읍 우산공원에서 열린 사적비 제막식에서는 현암 이을호선생의 동료이자 후배인 정종박사(현암 이을호 선생사적비 건립추진위원장)와 50여명의 사적비건립위원, 제자인 전남대 안진오교수, 전주대 김종일 교수 등 여러 학계·문화계인사들과 그를 기억하는 영광의 知人 200여명이 참석해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현암 이을호 선생은 1910년도 영광읍 백학리 출생으로서 서울 중앙고보와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동무 이제마선생의 사상의학설을 연구하여 소개함은 물론, 동양의학잡지 등의 창간을 도왔던 덕망있는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고향 영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연유로 2년여의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이을호 선생은 수형생활 중에 동양철학을 연구하고, 출옥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영광 민립중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에 부임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을호선생은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 전남대 교수로 부임한 후 한국 문화와 전통사상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특히 선생의 다산 정약용연구를 비롯한 실학사상의 연구업적은 지금도 한국학계의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선생은 1998년 3월 89세의 나이로 타계하셨는데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유문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이을호 전서』24권 9책을 간행한 바 있다. 이것은 광복이후 발행된 개인의 저술로서는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평가받고 있는 저서이다.

우산공원에 세워진 선생의 사적비는 가로 2M 10Cm, 세로 1M 20Cm 크기에 1M 20Cm의 기단석을 받친 와비의 형태이다.

이 사적비의 건립 논의는, 2000년 11월 『이을호 전서』의 출판기념회에서 처음으로 발의된 이후, 금년 6월 영광군 지역유지와 학계·문화계의 중진들을 중심으로 사적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하여 위원장에 정종 박사, 고문에 김봉열 군수를 추대하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제막식집행위원장은 김범무씨가 맡았으며 비문은 제자 오종일 교수가 지었고, 글씨 또한 제자인 배옥영씨가 썼는데, 그 비문에는 "선생의 빛남과 자랑스러움을 추앙하며 나라사랑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고 적고 있다.





이을호 선생 연보



1910년 음력 10월15일 영광읍 백학리에서 태어나 영광보통학교 영광중학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경성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함.



1933년 영광읍에 호연당 약국을 개업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한편 중앙의 신문과 학술지에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설을 처음으로 연재, 동서의학의 종합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음.



1937년 영광 체육단과 그 산하 갑술구락부 조직을 주도하여 민족의 각성을 깨우치는 독립 운동에 헌신하다가 9월13일 일경에 체포되고 목포 형무소에 투옥됨. 수형생활중 경학과 다산학에 심취함.



1945년 광복과 함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사재를 출연하여 영광민립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서 후학을 양성함.



1948년 광주의과대학병원 약국장에 취임하고 약제학을 강의하면서 동양의 철학과 한국의 문화를 연구함.



1952년 일본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전수한 우리 고장의 유학자 강항선생의 간양록을 발굴, 번역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도록 하는 등 언제나 애향의 일념으로 영광의 역사와 정신을 개발하여 향토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함.



1955년 전남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 다산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출판부장, 호남문화연구소장, 박물관장 등을 역임함.



1959년 다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 업적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다산경학을 전공함.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다산학 연구의 선도자가 되었으며 1976년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실학을 통하여 조선조 유학을 탐구함으로써 한국의 사상은 중국과 다른 독자성이 있음을 밝혀냄.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 초대관장으로 취임한후 지역문화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하여 박물관대학을 개설하는 등 한국의 역사와 사상을 올바로 인식하게 함. 한편 실학사상 연구논문집 다산학보를 창간함.



1983년 다산학 연구원을 창설하고 원장으로서 다신계 문화교실을 열어 실학정신의 대중화에 진력함.



1987년 광록회장에 취임하고 자연을 살리기 위한 푸른생명가꾸기 운동을 펼쳐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움.



1998년 3월13일 89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까지 일생을 하루같이 학문과 저술을 통하여 국학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 문학의 앞날을 밝히는 커다란 횃불이 됨

유족으로는 장남 원태와 성윤 정선 현영 정미 여란 등 2남 4녀를 두었고 묘소는 불갑면 봉동에 있음.



1999년 8월 15일 광복에 이바지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학술상과 자랑스러운 인물상 등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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