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지명의 유래를 보면, 백제시대 때의 이 지역 이름이 한자로 "武尸伊(무시이)"였다고 하는데 우선 이 한자표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소리내야 옳은가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옛분들이 우리의 땅이름을 한문으로 쓸 때 소리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뜻(訓)으로 쓴 흔적이 많고 보면 "武尸伊"를 어떻게 해석하고 소리내야 할 것인지 망설이게 된다.

그동안 국어 음운학자들의 향찰로 된 지명에 관한 연구발표결과를 토대로 볼 때 무시이는 “물”로 해석된다. 伊는 소리를 내지 않는 어조사로, 尸는 리을(ㄹ)로 쓴 흔적이 많으므로 武를 소리나는 대로 "무"로 읽는다면 "물"로 된다. 그러므로 영광의 백제 때 고을 이름은 "武尸伊"라 적혀 있을지라도 지금의 한자음대로 읽지 않고 "물"이라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 고장은 이처럼 백제시대에 武尸伊(물고을)이라 불렀고, 통일신라 시대의 무령군, 고려시대에 지금과 같은 영광(오성, 정주)이란 명칭을 얻기까지 여러 차례 변천과정을 겪었다. 한편 "옥당(玉堂)을"이란 별칭까지 갖게 되었다.

옥당(玉堂)이란 홍문관의 별칭으로 고려 초기에는 숭문관이라 했으나 성종이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도입해 지방관제 및 중앙관제를 홍문관으로 바꾼 뒤 조선조에도 그대로 부른 것이다.

특히 옥당이라 부를 때는 홍문관에 속한 종 2품이상의 제학이나 대제학을 빼고, 정 3품이하의 부제학,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등을 총칭하는 말로 왕의 시종학사들을 일컫는다.

시종학사란 궁중의 경서와 서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응하는데 모두 문관으로 임용된다.

그래서 옥당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2군(장성과 압해) 8현(함풍,모평,육창,임치,해제,삼계,장사,무송)을 거느린 전남서부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전국 13개 조창의 하나인 부용창(법성)이 있는 이 곳 영광으로 아무나 부임해 올 수 없고 품격 높은 중앙의 문관이 원님으로 온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 별칭을 부르거나 쓸 때 옥당고을과 옥당골을 분별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옥당골"이란 표기와 호칭이다. 물론 옥당골이 옥당고을의 줄인 말로(고을-골)도 풀이 될 수도 있으나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옥당고을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은 옥당골(谷: 계곡)이 아니라 옥당고을(郡: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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